돈을 벌기 시작한 이후 여행을 가면 꼭 차를 빌렸다. 아마 서울 시내에서는 차를 안못 가지고 다니기에 무언가 한이 맺혀서 그랬을 수도 있다. 제주도 파견 근무 때는 1달 내내 렌트카로 제주도 거의 전역을 싸돌아 다녔고 (밤새 응급실 근무 선 후 한숨도 못 잔 상태에서 산굼부리 지역을 구경한 후 한밤중에 졸면서 서부산업도로를 달린 아찔한 기억이 있다.) 작년 여름 스페인 여행, 그리고 가을 국내 여행에서도 차를 빌렸다.
항상 도보 혹은 대중교통만을 이용한 여행을 하다가 차를 몇 번 빌려보니 각 여행의 장단점이 뚜렸했다. 한쪽의 장점은 다른 쪽의 단점이 되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렌트의 장점은 한 마디로
시간과 장소의 제약이 없다.
는 점. 차가 있으면 내가 움직이고 싶은 시간에 내가 가고 싶은 장소로 이동할 수 있다. 아침에 일찍 출발하고 싶으면 일찍 출발할 수 있고 늦잠자다 점심 먹고 일정을 소화하고 싶다면 그것도 가능하다. 또한 장소의 제약도 없다. 이동거리가 아주 길지 않다면 내가 원하는 어디든 갈 수 있다. 이동하다 중간에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잠시 쉬어갈 수도 있고 만약 간 곳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도 있다.
대신 단점도 있다. 우선 돈이 많이 든다. 당연히 대중교통 혹은 도보만을 이용할 때보다 렌트비, 주유비 등이 더 든다. 또한 도보여행의 소소한 즐거움을 놓치기 쉽다. 난 여행의 진정한 재미는 유명 관광지나 쇼보다는 우연히 만난 사람과의 인연, 우연히 발견한 명소 같은 ‘우연성’에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차량으로 이동한다면 차량 내부, 나만의 공간에 있기에 다른 사람과의 접촉 자체가 차단되고 그 결과 내가 보려고 하는 것만 보게 될 가능성이 높다.
스페인 여행이 그러했다. 이동하다 경치좋은 곳에서 경치 감상도 했고 내가 원하는 곳으로 이동하여 내가 원하는 식당에서 식사하며 내가 원하는 것은 거의 다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창밖에 스페인의 모습이 펼쳐지는 것과 반대로 차 내부는 철저히 대한민국이었다. 그 어떤 스페인말도 들리지 않았고 내가 스마트폰으로 틀어놓은 대한민국 노래만 들렸다. 때문에 스페인을 갔으나 스페인을 느낄 일은 매우 적었다. (스페인에선 보통 하루에 5~6시간은 운전하면서 보냈던 것 같다.) 그 결과 스페인 여행을 마치고 다음 해외여행부터는 절대로 차를 빌리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따라서 우붓에 올 때에도 렌트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국제운전면허증은 만들 생각도 하지 않았고 렌트 자체를 알아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우붓에서 하루이틀 지내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길가를 다니는 수많은 스쿠터들. 조금만 걸어도 땀이 나는 날씨. 인터넷에서 찾은 명소는 걸어서 최소한 20분은 가야 한다는 점. 이런 것들이 내게 ‘바퀴달린 이동수단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생각만 하고 있을 뿐, 그것을 현실화할만한 구실이 없었다. 멀리 있는 식당을 가기 싫으면 그냥 숙소 근처에서 먹으면 됐다. 어차피 메뉴는 다 거기서 거기였기에. 우붓이 그렇게 큰 동네는 아니고 꼭 가봐야 하는 명소가 있지 않기에 그냥 산책 겸 하루에 1~2시간 걷고 카페에서 인터넷하며 놀면 되었다. 가고 싶으면 걸으면 되고 걷기 싫으면 안 가면 되었다.
여행 3일째, 드디어 이동수단을 마련해야 할 현실적인 구실이 생겼다. 계기는 발리에 대한 한 책이었다. 발리에 대한 인식은 휴양지이지만 발리도 여전히 역사가 있는 지역이다. 따라서 여행 전 서점에 가서 발리에 대해 소개해줄만한 책을 찾았고 내가 원하는 스타일의 책이 딱 있었다. 하지만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 일에 치여 살면서 책을 단 한 글자도 펴보지 못했고 발리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졸면서 반 정도 읽은 것이 전부였다. 우붓에 와서도 생각날 때 조금씩 읽었는데 거기서 나를 사로잡은 부분이 있었다. 바로, 발리의 역사적인 유적들!!이었다.
나는 역사 덕후라고까지는 못하지만, 나름 역사를 좋아하고 그래서 유적지 가는 것을 좋아한다. 게다가 이 유적지라는 곳들이 걸어서는 절대로 못 가는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 얼마나 ‘바퀴달린 이동수단’을 구해야만 하는 합리적인 이유들인가. 나는 바로 스쿠터 대여를 결정하였고 그 다음 날 바로 스쿠터를 타고 도로를 누볐다.
내가 타고 다닌 스쿠터다. 어느 정도 규모 있는 숙소에서는 대부분 스쿠터 대여를 해주는 것으로 알고 있다. 길거리를 돌아다니다 보면 스쿠터를 빌려주는 곳도 많이 볼 수 있다. 이전까지 8~9시에 아침을 먹었으나 이 날만큼은 6시반에 아침을 먹고 준비되는 대로 바로 출발했다. 첫 번째 목적지는 Gunung kawi. 오늘 갈 곳 중 우붓에서 가장 먼 곳이다.
6~7년만에 모는 스쿠터였으나 자전거만 탈 줄 알면 누구나 쉽게 탈 수 있는 운송수단이기에 나 역시 바로 적응했다. 문제는 기름을 얼마나 넣어야 풀로 차는지 몰랐다는 것이다. 계기판의 기름양이 거의 바닥에 가까웠기에 길가다 보이는 주유소에 들렀다. 앞의 운전자가 10,000 루피아를 주유하기에 나는 아무생각없이 20,000루피아를 넣어달라고 했다. 직원이 주유하는 동안 돈을 주섬주섬챙기는데 주유구로 무언가가 순식간에 넘치기 시작했다. 바로 기름. 앞 운전자가 10,000 루피아만 넣은 것이 괜한 이유는 아니었나보다. 결국 18,000 루피아 조금 넘게 주유한 후 (마지막 주유량의 대부분은 스쿠터의 기름칠에 쓰였다..) 주유소를 떠났다. 혹여라도 발리에서 스쿠터에 주유할 일이 있다면 10,000 루피아만 주유하길 바란다.
Gunung kawi로 가는 길 자체가 어렵지는 않았다. 그냥 쭉 가다가 왼쪽으로 한 번 꺾고 쭉 가면 구눙 카위였다. 하지만, 문제는 우붓을 벗어나는 순간 표지판에는 알 수 없는 말만 적혀 있었고 나는 이 동네에 완전 처음 온 초짜였다는 것이다.
미리 출발 전 구글 지도에서 위치를 숙지하고 혹시라도 잊을까봐 따로 지도를 그려갔다. 가면서도 구글 지도에서 gps로 위치를 계속 확인했다. 하지만 거의 30~40분을 달려 분명 지도 상의 구눙 카위 주변을 왔는데 전혀 안내표지를 찾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표지판이 있었으나 내가 못 읽었을 수도 있다.) 이 길과 저 길을 헤매다 우연히 도로 안쪽으로 들어가는 외국인을 발견했다. 외국인이 절대 없을 법한 시골 마을에서 외국인이 있다는 것은, 그리고 안쪽으로 걸어간다는 것은 그 안에 무언가 볼거리가 있다는 뜻이고 그것은 바로 저 안에 구눙 카위가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바로 안으로 들어갔고 그곳에 구눙 카위로 가는 입구가 있었다.
차량 주차장은 입구에서 꽤나 먼 곳에 있어보였으나 나는 ‘스쿠터’를 타고 갔으므로 입구 바로 주변에서 주차할 곳을 찾았다. 입구의 한 가게에서 할아버지가 수신호로 대충 입구 아무데나 두면 된다고 알려주었다. 주차를 하고 나니 와서 사롱을 사면 첫손님 기념으로 싸게 해준다고 했다. 할아버지 말로는 원래 50,000 루피아에 파는 걸 나는 30,000 루피아에 주겠다고 했다. 원래 가격이 어느정도인지는 모르겠으나 동대문에서 저 정도 천은 3,000원보다 훨씬 비싸게 팔리기에 그냥 샀다. 어머니 선물로 하려고 화려한 붉은 무늬의 사롱을 샀는데 들어가려고 보니 외국인 관광객들이 입구에서 사롱을 입고 있었다. 그렇다. 이곳은 힌두 사원이기에 모두가 사롱을 입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 결과 나는 상당히 화려한 사롱을 입고 구눙 카위에 입장하게 되었다.
나의 사롱
이런 멋진 풍경을 구경하며 계단을 한참 내려가다 보면
이런 문이 나온다. 문을 지나기 전 앞에 있는 항아리에 담긴 성수(聖水)를 머리에 뿌리라고 안내되어 있으니 잊지 말고 뿌리길. 문을 지나면 왼쪽으로
이것이 보인다. 이 광경을 보고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둔황석굴이었다. 크기나 규모면에서는 비교가 안되겠지만, 어쨌건 1000년 전에 산을 깎아 이런 건축물을 만들었다는 것이 너무나도 놀랍다. 그리고 이것들이 1000년을 버텨왔다는 것도.
구눙카위라는 말 자체는 ‘시(詩)의 산’이라는 뜻이고 이곳은 영묘(靈廟)로 사람이 묻힌 무덤이 아니라 죽은 왕이나 왕비가 죽음으로부터 해방되어 부활하기를 기원하는 곳이다. 11세기의 건물로 추정되며 자세한 것은 책을 참고하시길….
작은 천을 사이에 두고 반대쪽에는 위의 사진과 같은 영묘가 있다. 위에 네 개의 찬디(인도네시아식 석탑)는 왕비들의 영묘이고 아래의 다섯 개의 찬디는 왕의 영묘이다. 조금 더 가까이 가서 구경하고 싶었지만 일단 크기에 압도되어 접근하지 못했고 (각각 높이 7미터가량) 유적지 가까이는 가면 안된다는 본능에 의해 가까이 가보지는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바로 아래에 가서 보거나 저 계단을 올라가도 되지 않았을까?) 나는 그나마 저 계단 앞 잔디까지는 올라갔는데 외국인 관광객들은 더 멀리에서 구경하다 그냥 갔다.
구눙 카위에서 이제 입구로 돌아가야 하는데 순간 아까 내게 사롱을 팔던 할아버지가 cold drink가 있으니 돌아올 때 꼭 자기한테 사라고 얘기한 것이 생각났다. 그러면서 동시에 내가 얼마나 많은 계단을 내려왔는지도. 책에는 계단 수백개라고 되어 있는데 천 개에 가까운 수백개는 아니고 200개 정도 되었던 것 같다. (사실 아무 생각없이 걷고 또 걸어서 몇 개인지도 모르겠다. 그냥 '많다.') 입구까지 와 보니 할아버지가 왜 cold drink를 계속 언급했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난 쿨하게(?) 그냥 안 마시고 다음 목적지로 떠났다. 다음 목적지는 Goa gajah. 다음 포스트에서 이동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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