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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이야기/[2017년~] 진료실에서

영국의 코로나 대응에 주목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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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코로나 대응이 화제다.

이탈리아, 스페인은 국가 자체를 봉쇄하면서 개개인이 집을 못 나오게 하는 등의 강력한 조치를 취하고 있는 데 반해,

영국은 사람들의 모임 자체를 금지하지 않고 발열 혹은 호흡기 증상이 있는 경우 그냥 집에서 최소 1주일 간 자가격리하라는 말만 했다.

지역사회 감염이 이미 시작되었다면서 delay phase에 맞는 전술을 시행하겠다고 했다.

영국 사람들은 물론 우리나라 사람들까지 이 조치에 대해 갑론을박 중이다.

어떤 사람은 '영국 정부가 국민들을 버렸다'는 강한 표현까지 썼다.

다른 나라는 모임을 다 금지하는데 국가가 나서서 스포츠 종목들의 중지를 강요하지 않는 것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았다.

영국의 Chief science adviser인 Sir Patrick Vallance가 한 인터뷰에서 Herd immunity(집단 면역)을 언급하면서 영국 언론들은 국민들의 60%가 감염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것이냐며 강하게 반응했다.


왜 영국은 이런 선택을 하게 되었을까?

내가 영국 정부의 속마음까지는 알 수 없으나 나름대로의 추정을 해본다.


1) Delay phase란?


전염병이 돌 때 방역의 첫번째 단계는 containment phase다.

확진자를 하나하나 찾아내고 그 확진자가 접촉한 사람들을 일일이 다 찾아내서 감염 여부를 확인한다.

필요하면 접촉자들을 격리한다.

이렇게 해서 병이 널리 퍼지지 않게 유도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해도 병이 퍼지거나 병을 너무 늦게 발견해서 지역사회 감염으로 넘어갔다면 delay phase로 간다.

delay phase의 목표는 병이 천천히 퍼지도록 하는 것이다.

이미 병이 퍼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으니 천천히 퍼지게 해서 의료 시설의 과부하를 줄이는 것이다.

동시에 병이 잘 퍼지는 겨울을 버티고 따뜻한 여름이 올 때까지 버티는 것이다.


delay phase의 핵심은 social distancing(사회적 거리두기)다.

사람들 간의 접촉을 줄여서 질병이 퍼지는 속도를 줄이는 것이다.

사회적 거리두기의 방법으로는 휴교, 스포츠 및 각종 행사 중단 등이 있다.


2) 영국은 왜 사회적 거리두기를 지금 당장 시행하지 않는 것일까?


사회적 거리두기는 상당히 급진적인 방법이다.

지금 프랑스나 스페인은 lockdown(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함)을 실행했고 프랑스는 필수 가게를 제외한 식당, 카페, 술집, 극장 등을 모두 닫았다.

이런 방법의 문제점은 장기간 유지할 경우 피해가 어마어마하게 크다는 것이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가게를 장기간 안 간다고 문제될 것은 없지만 그 가게를 운영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수개월 간 수입이 없어진다면 생존 자체에 위협이 갈 수 있다.

따라서 이 정책은 장기간 유지될 수 없다.



장기간 시행할 수 없는 '사회적 거리두기' 정책은 위 그래프에서 파란색 화살표가 가리키는 시점에 시행해야 가장 효과적이다.

그래야 가장 환자가 많을 때 정책이 유지되어서 그래프의 최고점을 낮출 수 있는 것이다.

만약 너무 이른 시기에 이 정책을 시행해버리면 환자가 늘면서 그래프가 한참 올라갈 때 사람들이 '사회적 거리두기' 정책에 지쳐버릴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의료기관이 수용할 수 있는 한계보다 많은 환자가 생기면서 많은 사망자가 발생할 수도 있다.


영국이 지금 당장 사회적 거리두기를 시행하지 않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영국은 지금 시점이 저 파란색 화살표가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한 인터뷰에서 영국 정부 관계자는 13~14주 후가 환자가 가장 많을 시기라고 예상한다고 했다.

따라서 영국 정부는 그 즈음을 목표로 사회적 거리두기 정책을 시행할 것이다.


3)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사실 우리나라 전문가들도 delay phase(완화 단계)로의 전환을 2월 말부터 주장했다.

기모란 대한예방의학과 코로나19 대책위원장은 2월 19일에 이미

"초기 국내는 신종 감염병에 대한 공포로 봉쇄조치를 통해 접촉자를 자가격리하고, 모든 환자를 병원에 격리하는 등의 대응책을 펼쳤지만, 이제는 완화 단계에 왔다고 본다."

"이 완화 단계에서는 코로나19 환자를 경증환자와 중증환자로 나누어 코로나19 확진자라 하더라도 경증환자는 자가격리하고, 중증환자는 병원격리하는 방식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다"

출처: 코로나19, 지역감염 단계 확대됐지만..."봉쇄전략→완화전략 필요" - 메디파나 뉴스

고 말했다.


봉쇄 단계(Containment phase)의 문제는 소비되는 자원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당장 대구, 경북만 보면 어마어마한 수의 의료진이 투입되어서 코로나 의심환자 검사, 확진환자 치료에 매달려 있다.

이렇게 모든 의료진이 온 힘을 다하는 것은 장기간 유지할 수 없다.

의료진들의 피로가 누적될 것이고 어느 시점에서는 하나둘씩 쓰러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이후에 발생하는 환자들은 적절한 조치를 못받게 되어 살 수 있는 사람도 죽게 될 수 있다.


또한 지금은 거의 모든 지원이 대구, 경북 지역에 몰려 있다.

해당 지역에서 소화하지 못한 환자들은 전국의 병원들로 이송되어서 치료받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대구, 경북 외의 지역에서 지역사회감염이 퍼지면서 대량의 환자가 발생할 경우 그 환자들을 수용할 수 어렵게 된다.


만약 코로나 바이러스가 3월 혹은 4월 중으로 잠잠해진다면 이렇게 온 힘을 다하는 정책이 옳을 것이다.

하지만 몇몇 전문가들의 예상처럼 코로나 바이러스가 수개월 동안 계속되고 다음 겨울까지 지속된다면 이런 정책은 어느 순간 부메랑이 되어서 다가올 것이다.

가장 필요한 순간에 의료진 및 의료자원은 고갈되고 수많은 사망자가 생길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도 이 delay phase에 대한 준비를 아예 안하는 것은 아니다.

경증 환자들은 의료기관이 아닌 생활치료센터에서 지낸다.

자가격리 시킬 수도 있지만 나라에서 시설을 만들어서 자가격리 대신 시설격리를 하는 것이다.

이런 생활치료센터는 대구 경북에 이미 개설되어 운영중이다.

타 지역에도 하나둘씩 개설을 준비하고 있어서 만일 다량의 환자가 발생했을 경우 수용할 준비를 하고 있다.



4) 영국 정부의 대응에 내가 주목하는 이유는?


영국은 그 어떤 나라보다 이성적이고 차분하게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처하고 있다.

국민들이 아무리 비난을 해도 가장 필요한 순간에 가장 강력한 정책을 시행해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영국이 '사회적 거리두기' 정책을 시행하는 순간은 영국 정부의 adviser들이 코로나 바이러스가 곧 피크를 칠 것이라 예상하는 순간이 된다.


영국의 코로나 확진자 및 사망자 수(확진 1391, 사망 35)가 이탈리아(확진 24747, 사망 1809)나 스페인(확진 7845, 사망 292), 프랑스(확진 5423, 사망 127)보다 적어서 이런 선택을 한 것일 수도 있다.

지금 당장은 1000명 이상 사망한 나라가 중국과 이탈리아 밖에 없으니 그 숫자가 커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코로나바이러스가 3,4월 내로 종료되지 않는다면 사망자 1000명은 흔히 볼 수 있는 숫자가 될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등은 너무 이른 시기에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카드를 사용해버린 것이 된다.


내가 영국 정부의 대응에 주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확진자가 급증하니 바로 가장 강력한 카드를 꺼내든 전세계 다른 나라들이 옳은 선택을 한 것일까,

아니면 확진자가 늘어나도 아직 정점은 아니라고 판단해서 가장 강력한 카드를 아껴둔 영국이 옳은 선택을 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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