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는 곳이 하이킹을 위한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조금씩 들었다. 사진에 보이는 곳에 길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냥 땅이 있으면 걸었다. 저 멀리 트레벨레즈가 보인다.
내가 오를 길을 파노라마처럼 찍었다. 사진에서 가장 높은 곳이 페냐봉으로 추측된다. (클릭하면 커진다.)
이런 곳을 그냥 걸어 올라갔다. 길은 존재하지 않고 방향만 정해서 그냥 걸어 올라갔다.
오른쪽 위에 있는 곳이 내 복표. 그냥 쭉 오르면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냥 걸었다.
건너편 산의 만년설. 바닥에 바위가 보이는가? 내가 저 위에 지금 앉아 있다.
한참을 오르다 저 위까지는 도저히 못 갈 것 같아서 저 건너편으로 가기로 했다. 현재 고도는 대략 2000미터쯤.
바닥의 상태는 점점 이렇게 변했다. 바위가 쪼개진 조각들이 바닥에 있어서 자칫하면 미끄러져 굴러떨어질 수도 있었다. 몸을 최대한 낮추고 조심조심 걸었다.
저기서 이쪽으로 건너왔다. 지금 생각해도 믿기지가 않는다. 하지만 앞으로 갈길이 멀다.
이 길들을 지나왔다. 중간에 구글 지도와 orux map의 트래킹 시스템을 비교한 결과 길을 좀 많이 벗어났다는 판단을 했다. 최대한 원래 코스쪽으로 이동하려고 노력했다.
내가 앞으로 가야할 길. 바닥은 바윗조각들로 미끄럽고 경사는 심했다. 자세는 땅에 거의 닿을 듯이 낮게 유지했다.
산 너머의 만년설은 그저 평화롭다.
저 바위 끝은 낭떠러지다. 한 10미터 이상? 무서워서 제대로 내려다보지도 못했다.
내가 가야할 길. 잘못하면 왼쪽 위의 바위 위 같은 곳에서 떨어질 수도 있었다. 이것은 영화가 아니라 실전이다.
바로 위위 사진에서 넘어가면 낭떠러지라고 했는데 지나와서 보니 낭떠러지가 심했다. 가파른 낭떠러지 위가 내가 그 전 사진을 찍었던 곳이다.
바위 조각들 사이에 홀로 서 있는 나무 하나는 내게 희망을 주었을까, 절망을 주었을까.
아래쪽을 바라보며 찍은 사진. 경사와 위험이 느껴지려나.
경치 하나는 끝내줬다. 하지만 어느새부턴가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여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 시간 1시. 약 2시간 가량 산에서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매고 있었다. 먹을 것이라고는 하몽 몇 조각과 물 조금, 그리고 맥주 한 캔이 전부. 혹시라도 미끄러져 조난당할 경우를 대비에 SNS에 나의 현재 위치와 함께 몇 시간 내로 업데이트가 없으면 신고해달라는 말을 남겼다. 다들 웃어넘기는 분위기였지만 나는 진지했다. 정말 발 한 번 삐끗하면 스페인 산골에서 조난사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아까 페냐봉이라고 생각했던 산은 페냐봉이 아니었다. 페냐봉보다 몇백미터는 더 높은 산이었다. 나는 저 중간에 우뚝 솟아있는 부분이 페냐봉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리고 방향을 그쪽으로 잡았다.
어느새부턴가 내가 갈 길보다 지나온 길을 찍게 되었다. 지나갈 때에는 어느 정도로 위험한지 몰랐는데 뒤를 돌아보면 정말 어마어마한 곳을 지나왔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본 아웃도어 광고가 떠올랐다. 그들이 어디서 촬영을 했는지 모르겠으나 진정한 광고는 이런 곳에서 찍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나의 복장은 티셔츠에 면바지, 그리고 운동화였다.)
여기서부터는 정말 위험한 구간이었다. 바윗조각들이 바닥에 계속 깔려 있고 경사는 어마어마했다. 혹시라도 조난사했을 경우 나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평소 잘 찍지 않는 셀카도 많이 찍어 놓았다. 적어도 내가 누구인지는 남길 수 있게. (사람 몸은 썩어 없어져도 카메라 sd카드는 남을 것이라 생각했다.)
계속 비슷한 고도를 따라 옆으로 이동했는데 어느 특정 부분에서 더이상 앞으로 가면 낭떠러지일 것 같다는 판단이 섰다. 그래서 가파른 경사였지만 아래를 향해 움직였다. 바닥은 바윗조각들로만 이루어졌다.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찍 적도 두어번 되었다. 그 때마다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도 2미터 이상 미끄러진 적은 없었다. 한참을 내려가니 덤불과 키작은 나무들이 보였다. 그쪽은 지나가기 더 수월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오산이었다. 키작은 나무들은 나의 진로를 방해했고 또한 앞에 무엇이 있는지 판단하기 어렵게 되었다. 나무 사이를 기다시피 하며 지나가는데 왠지 지나가면 절벽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오던 길을 다시 올라가 옆으로 향했다. 그쪽은 능선과 능선 사이 계곡이었다. 예전에 빨치산을 다룬 책에서 읽은 내용이 기억났다. 적어도 계곡을 따라 내려가면 산 아래로 내려갈 수 있다는 내용이. 계곡을 따라 내려갔다. 하지만 고려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바로 계곡 중간에 폭포같은 낭떠러지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조금 내려가자마자 바로 작은 폭포같은 것이 보였다. 높이는 한 10미터쯤 되려나. 옆으로 돌아가는 길이 있는데 바위에 아주 미끄러워보였다. 발을 헛디뎠다가는 바로 하늘나라행이었다. 방황했다. 현재 선택할 수 있는 길 중 최대한 안전한 길을 찾기로 했다. 일단 계곡을 따라 내려가는 계획은 안전해보이지 않았다. 다른 길을 택하기로 하고 다시 산을 조금 오르는데 저 아래 무언가가 보였다. 자연이 만든 것이 아닌 인간이 만든 것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내가 오른 쪽이 아닌 반대쪽으로 가야 했다. 다시 계곡으로 내려가 반대쪽으로 올랐다. 경사가 엄청났지만 올라갔다. 내려가는 길도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하나도 다치지 않고 내려갔다. 그리고 그것을 확인했다.
바로 이것이었다. 낙석주의 표지판. 저 멀리서 이것을 보고 희망을 가졌다. 적어도 표지판이 있으면 이곳은 사람이 다니는 곳이고 길이라는 의미였다. 표지판 앞의 길에 섰을 때 ‘살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농담이 아니고 죽을 수도 있었다.
이곳에서 페냐봉쪽으로 가서 페냐봉을 오를 수도 있었지만 몸도 마음도 너무 지쳐있었다. 바윗조각들 사이에서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발에 엄청나게 힘을 주고 걸었더니 발바닥이 너무나도 아팠다. 페냐봉 대신 생존을 선택했다. 반대쪽 길을 택했다.
내가 내려온 길을 기념으로 찍었다. 저 멀리 초록색 배경에 자갈이 깔린 듯한 느낌인 곳에서 여기까지 내려온 것이다. 내가 말한 키작은 나무와 덤불들은 중간의 초록색 나무들. 그리고 중간에 폭포같은 느낌의 계곡도 살짝 보인다.
숙소까지 돌아오는 길에는 너무 지쳐서 사진을 한 장도 찍지 못했다. 갈 때에는 너무나도 짧고 신났던 길이었는데 돌아올 때에는 너무나도 긴 길이었다.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었다. 아까 봤던 공사장에서 마을로 돌아가는 사람들에게 차를 태워달라고 부탁하고 싶었지만 힘이 없었다. 차들을 향해 손흔들어 보았지만 그들은 그냥 하이킹하는 사람이 인사하는 것이라 생각했는지 쓱 보고 지나갔다. 서울에서 부산 거리 같은 느낌의 길들을 걸어 숙소에 돌아왔고 그대로 침대에 쓰러져 기절했다.
내가 기록한 최고 고도에서의 기념(?) 스샷이다. 2139미터. 페냐봉보다 더 높은 고도까지 올라갔었다.
이것은 내가 움직인 거리를 트래킹한 것. 중간에 y자로 갈라지는 곳에서 그대로 아래쪽으로 따라 올라가서 작은 원을 그려야 했는데 완전 반대로 가서 어마어마한 원을 그렸다. 처음에 내가 갔던 길이 맞는 길이었는데 이유를 잘 모르겠으나 막혀있었다. 표지판에서 내려오면서 내가 막힌 것을 보고 돌아간 그 길이 나왔을 때 얼마나 허무했던지.
어쨌건 살아서 내려왔다. 당시엔 지옥과도 같고 너무나도 위급한 상황이었으나 이제는 추억이 되었다. 하지만 다음에 또 이런 산행을 할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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