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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이야기/[2010년] 본3 실습

<실습 첫 주> 강남 내분비내과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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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과 3학년 실습을 처음 돌기 시작하면 매일같이 블로그에 실습일지를 적겠다고 본2 내내 다짐했었는데 막상 실습을 시작하고 나니 정신이 너무 없어서 실습일지 쓰는 것을 잊었다. 그래도 다행히도 일주일만에 생각나서 많은 부분이 기억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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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2월 16일. 
  1. 의예과에 입학하면서부터 꿈꾸던 병원 실습을 드디어 나가게 되었다. 평소엔 입어보지도 못했던 정장이나 넥타이를 사느라 짧았던 겨울방학 내내 분주했다. 설 연휴로 인해 월요일은 실습이 없고 화요일이 첫 실습날이 되었다. 주말에 학생담당 레지던트 선생님께 연락드리니 아침 7시 50분까지 81병동으로 오라고 하신다. 강남세브란스병원은 어렸을 때부터 보기만 했지 한 번도 들어가본 적이 없어서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알겠다고 했다. 같이 돌 친구에게 연락한 후 다시 첫 실습의 설렘에 빠져들었다. 결국 실습 전날 밤에 새벽 4시까지 뜬눈으로 지새고 말았다. 6시 40분에 일어나야되는데...
  2. 잠은 비록 3시간도 못 잤지만 알람이 울리자마자 눈이 번쩍 떠졌다. 평소에는 울린지도 모르고 잤는데; 역시 사람은 필요에 의해 움직이는 동물인 듯하다. 정신없이 씻고 아침을 먹은 후 차로 태워주겠다는 어머니의 제안을 뒤로한 채 걸어서 병원까지 갔다. 나름 따뜻하게 입었지만 때아닌 늦추위는 너무나도 매서웠다. 처음 걸어가는 길이라 아파트 단지에서 헤매기도 했지만 워낙 일찍 출발한 덕에 늦지 않게 병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추위로 인해 코와 귀는 얼 것 같았지만; 병원에 도착해서 같이 돌 친구에게 연락해보니 학생휴게실로 오란다. 처음오는 장소에서 학생휴게실을 어떻게 찾는담.. 이리저리 지나가는 직원에게 물어 겨우 학생휴게실을 찾았다. 2년 동안의 실습 기간 동안 강남에 올 때마다 찾게 될 장소이니 지리를 눈에 잘 익혀두었다.
  3. 7시 45분이 되었다. 일단 81병동이 어딘지 확실히 모르니 미리 가 있기로 했다. 대충 눈치를 보아하니 8층의 병동이 81병동같아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8층으로 올라갔다. 역시나. 내리자마자 81병동이라는 글씨가 크게 젹혀있었다. 앞에는 흰 가운을 입은 선생님이 한 분 서계시고. '내분비 실습 나온 학생인가요?'라는 선생님의 질문에 '네'라고 둘이 동시에 대답했다. 무언가 시크하지만 친절해보이는 분이었다. 처음 실습나왔으니 전자차트(EMR) 쓰는 법부터 가르쳐주시겠다고 하셨다. 첫 실습이라 완전 긴장한 나와 친구는 뻣뻣한 자세로 선생님의 뒤를 따라갔다.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라며 선생님이 편하게 있으라고 했지만, 첫 실습에서 어떻게 편하게 있겠는가. 우리는 군기 제대로 든 자세로 선생님의 설명을 들었다. EMR은 과거에 손으로 적던 차트를 컴퓨터로 적어 놓은 것을 말한다. 이제 실습을 갓 돌기 시작한 학생인지라 EMR의 모든 기능을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엄청나게 혁신적인 프로그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환자의 과거 내원기록이나 간호기록, 투약기록, 검사기록 등등등등등을 한눈에 찾아볼 수 있는 프로그램. 게다가 문진이나 이학적 검사를 할 때 필요한 목록까지 다 나와있었다. 와우. 너무 기록자료가 많아서 어디서부터 뭘 어떻게 찾아봐야하는지 모르겠다는 문제가 있었지만 그래도 나중에 적응되면 쉽게 사용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져본다.
  4. EMR 설명을 마친 후 교수님을 따라 회진을 돌았다. 입원환자는 단 한 분. 설 연휴를 맞아서 환자를 모두 퇴원시켰고 연휴에 입원한 환자밖에 없다고 하신다. 유일한 내분비내과 입원 환자를 만나러 갔다. 전형적인 iatrogenic cushing's syndrome환자였다. 족보에서 글로만 보고 ppt에서 사진으로만 보던 moon face, central obesity가 너무나도 잘 보였다. 순간 '피식'하며 웃음이 터져나왔다. 속으로 '이러면 안되는데'라고 하면서도 웃음이 계속 나온다. 첫 실습의 흥분이 아직 가라앉지 않아서일까? 환자를 대하는 학생으로서 바람직하지 않은 태도인 걸 너무나도 잘 알기에 스스로를 조절하려고 노력했다. 이번 한 번의 실수로 끝나겠지.. 나중에 들은 바로 그 환자는 퇴행성 관절염의 치료약으로 steroid를 너무 과하게 복용하여서 adrenal insufficiency가 와서 cushing's syndrome이 왔다고 한다. 거기에 당뇨까지... 만병통치약인 steroid의 남용에 대해 내분비내과 교수님은 너무나도 안타까워하셨다. 벌레 하나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꼴인 것일까?
  5. 점심 먹고 학생휴게실로 돌아오니 많은 동기들이 쉬고 있었다. 아침에 교수님 만나고 쭉 쉬고 있는 학생도 있었다. 아마 설연휴가 끝난 다음날이라 수술이나 입원환자가 거의 없었던 모양이다.  외과에 일주일 간 수술이 하나라는 얘기도 있고 심지어 일주일간 휴가가신 교수님도 있다는 얘기도 있었다. 이래가지고 병원이 돌아가겠냐는 걱정이 여기저기서 나온다. 학생들이 이런 걱정까지 해야 하나. 뭐 어쨌든 환자가 없으면 병원 수입은 줄지만 학생들은 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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