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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이야기/[2010년] 본3 실습

산부인과 외래 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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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에는 산부인과 외래에서 꽤나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인 외래, 누군가에게는 사소한 에피소드이지만 제게는 기억에 남는 몇몇 환자분 이야기를 적어볼까 합니다.

#1.
첫 날, 첫 환자분이었습니다. 불임클리닉을 담당하는 교수님을 따라 도는 일정이었기 때문에 불임클리닉에서 환자를 만났습니다. 임신이 잘 안 된다는 이유로 불임클리닉을 찾은 30대 중후반의 외국인 여성분이었습니다. 나이도 어느 정도 있고 해서 그저 전형적인 불임 환자가 외국 국적만 가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교수님 역시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그냥 평소에 우리말로 하는 질문들을 영어로 물어보셨습니다. 월경력이라든가 산과력 등등을 물은 후 환자의 개인 정보에 대해 물어보았습니다. 뭐하는 분인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중국에 거주 중이며 가끔 서울에 온다고 했습니다. 불임 검사를 하는 데에는 여자 쪽 요인도 확인해야 하지만 남자 쪽 요인도 확인해야 해서 남편분을 모셔오라는 의미로 'where is your husband?'라고 묻자 그 분이 'i'm not married. i just live with him.(?)'이런 뉘앙스로 대답했습니다. 순간 난 '의잉??'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혼도 안하고 남자랑 동거하는데 아이가 안 생긴다고 불임 클리닉을 찾다니... 무언가 제가 가지고 있는 '상식'으로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교수님도 혼란스러우셨던지 그 이후 계속 'husband'라는 표현을 쓰시더군요. 무언가 'partner'같은 단어가 더 어울릴 것 같았는데.. 어쨌든 우리나라와는 다른 외국의 문화를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는 사이 더 충격적인 대답이 나왔습니다. 남자 분이 몇 세냐는 질문에 환자는 'fifty-two'라고 대답했습니다. 제 머리 위에 물음표가 또다시 요동을 쳤죠. 거의 15세 연상의, 오십대 남자와 동거를 하면서 임신이 잘 안된다고 불임클리닉을 찾는다, 그것도 자신이 살고 있지 않은 서울에서... culture shock이 채 가시기도 전에 환자분은 면담을 마치고 나갔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경우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에게는 너무나도 충격적인 환자였습니다.

#2.
바로 그 다음 환자였습니다. 삼십대 초반의 여성이 친정어머니로 보이는 분과 함께 들어왔습니다. 교수님과의 대화를 들어보니 임신이 잘 안되다가 어렵게 임신이 된 환자로 임신이 잘 유지되고 있는지 확인하고자 내원하신 것 같았습니다. 간단한 면담 이후 환자는 초음파 검진을 받았습니다. 저도 따라가서 초음파 화면을 보았습니다. 생전 처음보는 임신 초기 질식 초음파였습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습니다. 차트에 분명 IUP 7wk라고 써 있었는데 태아 심음을 듣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처음 보는 초음파라 심음을 어떻게 듣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확인하지 않은 것은 확실했습니다. 질식 초음파의 경우 IUP 6주에 태아 심음이 들린다는 게 왕족인지라 항상 머리에 박아 넣고 있었는데 이상했습니다. 교수님은 이리 저리 사진을 찍더니 초음파 검진을 마쳤습니다.

초음파 검진 이후 교수님은 무거운 목소리로 환자분께 말씀하셨습니다. 
" 태아가 있기는 한데 지난주와 비교해서 전혀 자라지 않았습니다. 태아 심음도 전혀 확인되지 않고요. 지난주에도 이상해서 이번주에 다시 오시라고 한 것인데 아마 유산된 것 같습니다. 일단 이번 임신은 종결하고 빨리 다음 임신을 준비하셔야 겠습니다."
역시 무언가 이상하다 싶더니만 아이가 유산된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듣는 산모와 친정 어머니의 표정은 정말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변했습니다. 친정어머니가
" 정말요? 얘 임신했다고 얘 남편은 물론이고 시아버지가 너무 좋아하셨는데 어떻게 말해야 하나...."
그 이후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작년 이맘때쯤 결혼을 했는데 결혼 하자마자 나이가 많다면서 빨리 아이를 가지라고 했답니다. 원래 불임은 1년 이상 정상적인 부부관계에도 아이가 생기지 않는 것인데 무언가 시댁 쪽에서 압박을 엄청 넣으니 결혼하고 1년이 되기도 전에 불임클리닉을 찾은 모양이었습니다. 아이가 생겼다고 시댁에서 엄청나게 좋아했던 모양인데 몇 주만에 유산되었다는 말을 전하려니 산모도, 그리고 친정 어머니도 난감한 듯 보였습니다. 시댁에선 산모가 아이를 못 갖는 것 아니냐는 소리까지 했다는데... 1년도 안되어서 아이가 안 생겼다고 며느리를 이렇게까지 압박주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나 봅니다. 산모와 친정 어머니의 표정에서 '아, 또 시댁에서 엄청 구박받겠구나'라는 것이 너무나도 잘 보였습니다.

결국 산모는 수요일에 유산된 아이를 긁어내는 시술을 받았습니다. 아마도 시댁에서 직접 대놓고 말하지는 않더라도 앞으로 임신에 대한 엄청난 압박을 줄 것 같습니다. 수치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초산모의 상당수가 spontaneous abortion을 겪는다고 배웠습니다. 3번 연속으로 유산하지 않는 한 유산은 자연스럽게 생길 수 있는 것입니다. 첫 12주 유산의 50%이상의 요소가 염색체 이상입니다. 정자나 난자가 수정해서 분화하면서 순간 문제가 생겨서 trisomy이 된다거나 하는 등의 이상이죠. 임신 초기 유산, 그것도 첫 유산은 산모의 탓도 아니고 남편의 탓도 아닌, 세포 분열 시 mutation 여부를 남겨두어 지구의 다양성을 꾀한 신의 탓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3.
이번엔 외래 환자입니다. 질 분비물을 주소로 내원한 20대 초중반의 미혼 여성입니다. 최근 월경이 나와야하는데 나오지 않은 증상도 있었습니다. 교수님이 자궁 경부 검사를 진행했고 딱히 특이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산부인과 내진을 마치고 나오는 환자에게 교수님이 물었습니다.
교수님: "임신했을 가능성이 있나요?"
환자: "네? 아뇨."
'아니오'라고 말했지만 눈이 똥그래지는 게 100% 아니라고 장담하지는 못했나 봅니다. 
교수님: "그래도 혹시 모르니깐 일단 임신테스트를 하고요 다른 질환일 수도 있으니깐 초음파 검사도 받은 다음에 다시 오세요"
환자가 "네"하고 나가는데 이미 머리속은 '임신'이라는 단어로 꽉 차서 뒤에 한 말은 거의 듣지도 않고 나갔습니다. 미혼인데다가 20대 중반에 임신일 수도 있다는 말을 들으니 혼란에 휩싸였겠죠.

오후 외래에 그 환자분이 돌아왔습니다. 표정이 한결 밝더군요. 결과를 보니 임신은 아니었고 초음파 결과에서도 딱히 특이한 것은 없었습니다. 결국 조금 더 지켜보자는 것이 교수님의 결론. 환자는 임신이 아니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오늘 외래 진료에 대해 충분히 만족한 듯한 표정이었습니다. 증상의 원인을 못 찾겠다고, 증상이 심하지 않고 비특이적이니 지켜보자는 교수님의 말에도 싱글벙글 웃으며 '감사합니다'를 외치며 나갔습니다. 밖에서 자기 몸 관리 잘 안하는 남자분들이 이런 광경을 꼭 봤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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