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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이야기/[2010년] 본3 실습

처음으로 환자와 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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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태어나서 처음으로 환자와 싸웠습니다. 학생이 무슨 환자와 싸울 기회가 있겠냐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2.
산부인과 실습에서는 예진을 봅니다. 예진에서 무엇을 하냐 하면 교수님 외래 진료볼 때 시간을 좀 더 줄이기 위해 학생이 초진환자의 과거력, 가족력 등등을 미리 묻고 기록을 해두는 것입니다. 예진을 보는 것을 통해서 학생은 환자와의 직접 대면해서 질문할 수 있고 교수님 입장에서는 10분 가량을 절약할 수 있으니 윈-윈인 것이죠. (물론 학생이 없으면 인턴 선생님이 예진을 봅니다. 외래의 시간 절약이 예진의 최대 목적임을 부인할 수는 없죠.)

하지만 문제는 환자는 예진이 무엇인지 모르고 또 예진보는 사람이 학생인지는 더더욱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간혹 환자와 문제가 생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고 전 몇 번..) 

#3.
제가 하는 예진의 일반적인 과정은 이러합니다. 간호사 선생님이 예진 볼 환자 리스트를 적어줍니다. 제가 나가서 환자분을 부르면 환자분이 예진실에 들어옵니다.

나: 안녕하세요. 교수님 진료 보시기 전에 제가 몇 가지 여쭤보겠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이것저것 물어봅니다. 병원에는 어떻게 오셨는지, 가족력, 본인의 과거력, 수술력 등을 묻고 월경력, 출산력을 묻습니다. 그리고 키, 몸무게를 묻고 예진이 끝납니다. 

제가 필요로 하는 정보는 대부분 환자의 현재 증상보다는 과거의 백그라운드에 대한 내용이기 때문에 이런 것에 만족 못하는 환자분들이 많습니다. 그냥 무난하신 분들은 이런 질문들을 마치고 제가

나: 됐습니다. 나가 계시면 교수님 진료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라고 말하면 그냥 나가십니다. 하지만 몇몇 분들은 '예진=의사의 진료'라고 생각하셔서인지 제게 본인의 증상에 대해 열심히 이야기하십니다. 어딜 가서 뭘 했더니 뭐가 어쩌고 저쩌고... 막 이야기 보따리를 펼치시려는 자세를 취하면 전 이야기를 끊고 제가 할 질문을 합니다. 이야기를 들어봤자 제가 딱히 도와드릴 수 있는 것도 없고 그 이야기보따리를 기록지에 남길 수도 없는 노릇인데다가 밖에서는 예진 천천히 한다고 눈치주는 간호사 선생님들이 있기 때문이죠. 

어떤 분은 본인이 중국에 가서 진맥을 받았더니 난소암이 의심된다는 이야기를 하시려다 제가 두어번 끊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환자: 난소암이 뭔지 알긴 하세요?

딱 봐도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 제 태도에 불만이 쌓여있다가 폭발하신 것이었습니다. 저 스스로도 다른 사람의 화난 기분을 잘 맞춰주는 성격이 못되는지라

나: 저도 난소암이 뭔지 알긴 하는데 저보다는 교수님이 더 잘 아시니 교수님께 말씀하세요.

라고 했습니다. 결국 살벌한 긴장의 상태에서 예진을 끝내고 나가셨습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저런 분이 특이한 케이스인 줄 알았습니다.

#4.
오후 예진인 날이었습니다. 1시부터 예진을 보는데 3시 좀 넘으니 초진환자가 끊겼습니다. 한시간 가량을 그냥 기다리다 나와서 간호사 선생님께 예진 끝났냐고 묻자 환자는 없을 것 같은데 4시반까지는 있어야 한다시더군요. 그래서 또 기다렸습니다. 갑자기 4시 15분에 간호사 선생님이 잊고 예진 안 본 환자 한 명 보고.. 또 기다리다 4시 반이 되어서 예진실을 나와 간호사 선생님께 가도 되냐고 물어보려는데 어떤 분이 예진실에 들어가시더니 '아무도 없는데요?'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전 당황해서 급작스럽게 들어가서 예진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자리에 앉아서 EMR을 켜고 예진볼 준비를 하는데 이 환자분이 자리에 앉지를 않으십니다. 제가 말했죠.

나: 자리에 앉으셔도 되는데요.
환자: 전 서 있는 게 편한데요.
나: 그래도 서 계시면 제가 신경쓰이는데..
환자: 제가 허리가 아파서 서 있어야 합니다.

결국 환자는 계속 서서 왔다갔다 하셨습니다. 제가 뭐하는지 모니터 화면을 다 보면서..
전 예진의 통상적인 과정을 진행했습니다. 어떻게 오셨는지, 가족분 중에 고혈압/당뇨/결핵/간염 앓으신 분 있는지 갑상선/천식 질환 있는지 등등등. 여느 때처럼 묻는데 환자분의 반응이 이전 분들과는 다릅니다. 며칠 전에 입원했다 퇴원했고 그 때 다 말했다는 것을 누차 강조하셨습니다. 6개월의 짧은 실습에서 yes/no로 체크하는 기록은 믿을 게 못된다는 생각을 배웠고 또 환자분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인지 전 그냥 무시하고 제가 할 질문을 했죠. 그러다가..

나: 마지막 월경 시작일이 언제죠?
환자: 기억이 안 나는데요.
나: 대충이라도 언제인지 모르세요?
환자: 수첩을 놓고 와서 잘 모르겠어요. 그거 지난번에 다 얘기했다니깐요.

환자분이 기억을 못하신다니 전 입원기록을 살폈습니다. 질문하는 내내 퇴원기록을 보면서 물어보긴 했지만 퇴원기록에 월경력은 없더군요. 그래서 입원기록을 다시 봤습니다. 거긴 있어서 기록을 적자 환자분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환자: 제가 아까부터 계속 기록이 다 있다고 말했는데 계속 안 찾아보다가 왜 이제서야 찾아보세요? ......

.....는 환자분이 말한 내용을 모두 기억하지 못하기에 줄인 것입니다. 대충 첫 마디의 반복이었습니다. 본인이 아까부터 계속 모든 게 기록에 있으니 기록 보라고 했는데 왜 귀찮게 계속 묻느냐는 것. 제가 성격이 나한테 화내는 사람에게 바로 맞불놓는 성격이라 저도 울컥해서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뭐라고 한지 기억은 잘 안나지만 상소리는 하지 않았습니다. 환자분도 더 화내시고..

말싸움을 대충 요약하자면

환자: 왜 기록을 보라는 내 말을 안 듣고 계속 질문을 해대느냐
나: 기록에 있어도 다 물어봐야 하는게 내가 할 일이다.
환자: 이 병원에서 기록한 건데 왜 그걸 안 보냐. 그리고 내가 기억못한다니깐 그제서야 기록을 보는 것은 또 뭐냐. 병원에서 환자를 편하게 해주어야지 왜 불편하게 하느냐.

이런 내용의 반복이었습니다. 전 말싸움해봤자 아무 소용 없다고 생각해서 

나: 죄송하다. 나랑 싸워봤자 도움될 것 하나 없으니 나가서 교수님 진료를 기다려달라. (이렇게 말한 건 아니고 내용을 요약하면 이런 내용.)
환자: 왜 본인 잘못 인정하지 않고 나보고 나가라고만 하느냐.....(역시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은 환자분이 더 한 말이 있지만 생략)

전 이후 죄송하다는 말을 수십번 했습니다. 사실 기록을 보라고 했을 때 안 본 것은 제 잘못이니깐 그냥 '죄송하다'라고 한 것은 아니고 진짜 죄송해서 죄송하다고 한 것입니다. (물론 환자분을 빨리 나가게 하려는 목적도 없다고는 못하겠습니다만..) 하지만 환자분은 제 잘못을 빨리 인정하라고 또 소리치셨고 전 제가 잘못한 것 인정하고 이렇게 나와 싸워봤자 둘에게 모두 도움될 것 없으니 나가서 기다려달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이런 말다툼 끝에 환자분이 나가셨습니다. 제가 평소에 하는 질문의 반도 안했지만 시간은 거의 두배나 걸렸던 예진이었습니다. (싸우면서도 환자분의 입원기록에 나와있지 않지만 제가 적어야 하는 정보들은 다 적었습니다.) 환자분이 나가고 나서도 저 스스로 화가 가라앉지 않아 씩씩대며 앉아있다가 입원기록에 있는 내용을 옮겨 적었습니다. 환자분이 기억을 잘못하신 건지 몰라도 다른 내용이 좀 있긴 했습니다...

#5.
위 에피소드에서 제가 잘했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일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제가 워낙 평소에 '말로 하는 친절'과는 거리가 먼 사람인지라 이 분 외에도 저의 무뚝뚝한 불친절에 기분나빠했을 사람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또한 불친절한 의사라고 욕먹는 많은 의사 선생님들에 대한 이해도 조금 생겼습니다. 아마 이런 것들이 지속되다보면 환자분들이 기분나빠하는 의사가 되는 것이겠죠?

하지만 비단 이것이 의사들만의 잘못은 아닐 것입니다. (첫 날 환자분이 이야기를 길게 하셔서 예진이 길어지자 들어와서 예진 좀 빨리 보라고 타박하신 간호사 선생님이 저에게 '말 끊고 질문하기' 신공을 발휘하게 한 장본인) 제가 불친절한 면도 있었지만 자신에게 질문하여 답하게 하지 말고 기록을 보고 옮겨적으라는 환자분의 태도도 쉽게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글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저를 대하는 환자분의 태도는 마치 아랫사람을 대하는 윗사람의 모습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6.
이런 일이 있었지만 예진은 여전히 기대되는 시간 중 하나입니다. 어쩌면 이런 일들이 있기 때문에 예진 시간이 기대되기도 합니다. 나의 부족한 점을 깨달을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외래 진료처럼 진단과 처방을 할 필요 없고 환자와의 커뮤니케이션 스킬만 연습하면 되는, 그리고 그 환자의 질병에 대해 책임 또한 질 필요 없는 경험이 또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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