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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진이, 지니 - 정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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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에 다시 간 것은 2016년이었다. 2002년에 마지막으로 동물원을 갔으니 2002년이었으니까 14년만이었다. 미국 캔자스시티에 놀러갈 일이 있었고 그곳에서 캔자스 시티 동물원을 가기로 했다. 오랜만의 동물원 방문이라 설렜다. 성인이 되어서도 과연 동물을 좋아할까?라는 궁금증도 있었다. 지루하면 어떡하지?라는 걱정도 들었다.

동물원에서 돌아다니면서 내게 느낀 감정은 내 예상을 벗어났다. 설렘이나 지루함이 아니었다. 내가 느낀 것은 연민이었다. 캔자스시티 동물원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예전 동물원처럼 철창 안의 좁은 공간에 동물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구조는 아니었다. 최근 많은 동물원들처럼 동물 보존에 높은 가치를 두고 동물들이 조금이나마 더 편하게 지낼 수 있게 우리가 넓었다. 심지어 한쪽 구역은 사파리처럼 드넓은 공간에 여러 동물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도 있었다. 내가 지금껏 가본 동물원 중 가장 컸다.

하지만 연민이 드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동물들은 넓더라도 본인들이 원하는 공간에 있지 않았다. 야생에 있으면 누군가 자기를 잡아먹을 수도 있고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해 오랫동안 굶을 수도 있었다. 동물원에서는 그런 걱정은 없다. 하지만 그들이 너무 불쌍했다. 그들에게는 '자유'가 없기 때문이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2019년 12월호에는 호랑이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미국 내에 있는 호랑이의 개체 수가 나머지 전 세계 야생에 있는 호랑이를 모두 합친 것보다 많다는 내용이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미국 내에 있는 호랑이들은 호의호식하지 않았다. 몇몇은 태어나자마자 어미와 떨어져 어떤 사람의 애완동물이 되었다. 어떤 호랑이는 돈벌이 수단이 되었다. 호랑이와 같이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기회를 주면서 수천달러를 받는 사람도 있었다. 호랑이는 위험한 동물이기에 사람들 앞에 나서기 전에 혹독하게 훈련을 받았다. 말이 '혹독한' 훈련이지 사실상 구타와 폭행의 대상이 되었다. 게다가 너무 커서 돈벌이 수단이 되지 못하면 호랑이 주인들은 그 호랑이를 죽였다.


정유정의 신간 「진이, 지니」를 읽으면서 위 일들이 떠오른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야생에 있던 보노보가 밀렵꾼들에게 잡혀 어딘가로 밀수되는 장면이 소설의 시작이니 작가도 이런 주제를 담고자 했을 것이다.

내가 동물원 철창 안의 동물들을 보면서 제3자의 시선으로 동물들의 고통을 상상했다면 주인공 이진이는 직접 보노보 지니의 몸 속으로 들어가서 고통을 직접 느낀다. 밀렵꾼들에게 쫓길 때의 두려움, 철창 안에 갇혀 배를 타고 멀리 옮겨질 때의 무서움.

지니의 상태로 있다가 정신차려보니 병원에서 많은 인간들이 자기를 잡으러 오는 장면이 가장 인상깊었다. 분명 김민주와는 문자를 이용해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지만 다른 인간들은 보노보를 그저 '동물'로만 바라봤다. 보노보가 이전에 사람을 해치고 기물을 파손하는 등 문제를 일으키기는 했지만 많은 상황에서 보노보를 생각이 있는 객체로 바라본 인간은 없었다. '동물원 원숭이'로만 바라본 것이다.


솔직히 정유정의 책에서 이런 내용을 기대하지 않았다. 내게 그의 소설은 어두컴컴하고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따뜻하고 밝은 내용보다는 스릴러에 가까웠다. 물론 「진이, 지니」역시 밝기만 한 소설은 아니지만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는 훨씬 따뜻했다. 몇주, 몇달을 넘어가는 오랜 시간의 얘기가 아니라 단 3일의 이야기. 게다가 동물보호를 다룬다니 상상과는 완전히 달랐다. (물론 동물 보호만이 주된 주제는 아니다.)

하지만 소설은 역시나 만족스러웠다. 한 번 시작하면 멈출 수 없는 속도감, 읽다보면서 '아 이래서 이런 설정을 둔거구나'라고 무릎을 치게 만드는 꼼꼼함은 소설이 밝아졌다 하더라도 사라지지 않았다. 또 하나. 영화로 만들면 참 좋겠다, 라는 생각이 드는 것 역시 그대로였다.

마지막으로 이 소설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구절을 남긴다.

그녀는 내게 삶이 죽음의 반대말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삶은 유예된 죽음이라는 진실을 일깨웠다. 내게 허락된 잠깐의 시간이 지나면, 내가 존재하지 않는 영원의 시간이 온다는 걸 가르쳤다. 그때가 오기 전까지 나는 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삶을 가진 자에게 내려진 운명의 명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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