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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전 세계 도시들의 18세기 모습에 대해 여러 필자들이 짧게 적은 글들을 모았다. 나는 각 글들의 내용을 간단히 정리해보고자 한다.
1부 유럽의 중심
- 암스테르담
18세기 암스테르담은 유럽의 경제 수도였다. 자본주의 경제 발전과 부르주아 문화가 발전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한 사람들 중 몇몇은 큰 돈을 벌었지만 대부분은 저임금으로 장시간 일하면서 가난하게 살았다. 빈부격차가 심해지면서 암스테르담 정부는 ‘라습하위스’라는 것을 만들었다. 이곳에 빈민 혹은 경범죄자들을 수용하여 ‘교육시킨다’는 명목으로 일을 시켰다. 암스테르담의 자본주의는 튤립 버블이 상징적이다. 또한 과학기술과 문화도 발달하였다. 돈을 많이 번 상인들은 자신의 모습을 회화로 남기려 하였고 대표적으로 렘브란트의 그림들이 이런 것을 잘 보여준다.
- 베를린
1701년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1세는 베를린을 수도로 정했다. 이후 프리드리히 2세는 프랑스의 계몽주의에 큰 영향을 받아 베를린을 크게 바꾸었다. 17세기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프랑스에서 박해받던 칼뱅파 신교도들인 위그노파들에게 브란덴부르크(=베를린)로 오면 특별 대우를 해주겠다는 칙령을 발표했다. 이에 6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베를린으로 이주했다. 베를린의 장다르멘마르크트(gendarmenmarkt)에 가면 프랑스 돔과 독일 돔이 있다. 기존에 독일 돔만 있던 것에 왕이 위그노파를 위해 프랑스 돔을 짓고 프랑스어 예배를 보게 해준 것이다.
프랑스인들 외에도 많은 난민과 이주민들이 베를린으로 왔고 이들은 베를린의 다양한 문화 발전에 기여했다.
- 베르사유
태양왕 루이 14세는 혼란한 파리를 떠나 베르사유에 새로운 궁전을 지었다. 베르사유 궁전과 정원은 각각 ‘인간에 대한 통치’와 ‘자연에 대한 지배’라는 루이 14세의 생각을 반영했다. 궁전에서는 각종 예절과 예씩들을 통해 사람들이 위계적인 관계를 체득했다. 왕과 가까이 있어야 더 많은 권력과 부를 얻게 되었다.
프랑스 혁명 이후 베르사유 궁전은 박물관이 되었고 보불전쟁, 1차대전에서 전후회담 개최지 역할을 했다.
- 파리
루브르는 사실 예전부터 요새였다. 그러다 샤를 5세가 루브르를 궁전으로 바꾸었다. 루이14세가 궁전을 베르사유로 옮긴 이후 루브르는 예술공간이 되었다. 왕실 보물들을 보관하고 각종 예술작품을 전시하는 공간이 되었다. 프랑스 혁명 이후 나폴레옹은 왕실에서 보관하던 작품들 및 전리품들을 전시하기 위해 루브르를 박물관으로 바꾸었다.
- 빈
1683년 오스만제국이 빈을 침공했다. 오스트리아는 오스만제국군을 막기 위해 성곽 바깥을 모두 태워 없앴다. 폭 최대 450미터, 총 길이 5.2킬로미터에 이르는 이 공간은 현재 링슈트라세가 되었다. 이곳은 19세기 중반 개발되기 시작했다. 오스만 침공 이후 18세기 초 빈에는 화려한 바로크 건축물들이 지어졌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즉위 후 왕위 계승 전쟁, 슐레지엔 전쟁을 겪었고 이후 개혁을 추진했다. 또한 그녀는 쇤브룬 궁전을 보수, 확장했다. 그녀는 궁전을 수수한 로코코 양식으로 지었다.
2부 또다른 유럽
- 바스
영국의 바스는 고대부터 온천도시였다. 그러나 병자들만 찾는 작은 도시였다. 그러다 18세기들어 온천수를 마시는 치료법이 유행하고 도로 사정이 좋아지면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몰려든 사람들은 이곳에서 휴식과 오락, 사교를 원했다. 그로 인해 바스는 다양한 문인들, 부유층들이 모이는 장소가 되었다.
‘보beau 내시’라 불리던 내시는 바스의 발전에 가장 크게 기여한 사람이다. 그는 새롭게 방문한 사람들이 사교계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지 여부를 확인하고 이들을 서로 소개하며 다양한 사교 모임과 오락거기를 주선했다. 사람들은 펌프룸pump room에서 온천수를 마시며 음악을 듣거나 사교 생활을 했고 어셈블리룸assembly room 등에서 각종 무도회나 음악회를 즐겼다. 로열 크레센트, 서커스, Queen’s square 등은 이런 바스의 명물이자 상징적인 건물이 되었다.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쇼핑가도 형성되고 각종 사치품들이 모였다. 그러나 사람들이 모이면서 도박, 소음, 무질서 등 각종 문제가 발생하였고 18세기 말이 되자 사람들은 다른 휴양 도시를 찾아 떠났다.
- 에든버러
에든버러는 옛부터 스코틀랜드의 수도였다. 에든버러성과 홀리루드하우스 궁전을 잇는 하이 스트리트는 로열 마일Royal mile이라 부른다. 이 길은 왕족과 귀족만 다닐 수 있었다. 그래서 일반 시민들은 클로스close라 불리는 뒷길을 이용했다.
18세기들어 스코틀랜드 계몽주의가 만개하면서 에든버러는 학문과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다수의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활동했고 많은 사람들이 독서에 열중했다. 순회도서관이 생겼고 공공도서관 설립 운동도 일어났다.
에든버러가 발전하면서 18세기 중반 신시가지 개발이 시작되었다. 젊은 건축가 제임스 크레이그는 동서로 쭉 뻗은 대로를 중심으로 남북으로 통행로를 낸 도시 계획을 제출하여 선정되었다.
- 제네바
장 자크 루소는 제네바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시계공이었고 어머니는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다. 그들은 집안의 반대를 이기고 결혼했지만 루소의 어머니는 루소를 낳자마자 사망했다. 이후 돈 문제에 시달리던 아버지는 상류층 거리에서 하류층 거리로 이사했고 이후 루소와 형을 두고 도망갔다. 루소 역시 16세에 제네바를 떠났다. 루소는 프랑스에 머물면서 제네바로 돌아가려 했지만 그에게 적대적이었던 볼테르가 제네바에 정착하면서 그것을 포기했다. 제네바의 통치세력들은 프랑스 귀족을 따라 하려했지만 루소는 주권이 인민에게 있음을 강조하는 사회계약론을 쓰는 등 제네바에서 미움을 받게 된다. 제네바는 루소를 국가의 적으로 비난했지만 프랑스 혁명 이후 그를 복권시켰다
- 피렌체
피렌체는 르네상스의 도시다. 사람들은 피렌체를 방문해서 세속의 천국을 맛보려 한다. 세례당에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두오모(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로 이동하면서 천국에 간다. 그래서 로렌초 기베르티는 세례당에서 두오모로 가는 문을 ‘천국의 문’으로 만들었다.
르네상스 시대 이후 메디치가가 몰락하면서 피렌체도 몰락했다. 그러다 19세기 들어 리소르지멘토의 일부로 다시 살아났다. 이 차이는 19세기에 조성된 레푸블리카 광장과 13세기에 조성된 산타크로체 광장을 비교하면 확실히 나타난다. 산타크로체에는 조용히 과거가 잠들어있지만 레푸블리카 광장에는 현대 자본주의적 욕망이 활개친다.
- 베네치아
중세 말에도 베네치아는 관광도시였다. 그 당시에는 예루살렘 순례를 위해 배를 타는 경유지였다. 그러다 18세기에 베네치아는 본격적인 관광도시가 되었다. 17세기 영국에서부터 귀족 자제들 사이에서는 유럽을 여행하는 그랜드 투어가 유행이었다. 그들은 베네치아를 꼭 방문했다. 베네치아에는 도박과 매춘이 발달해있었기 때문이다. 환락의 도시 베네치아는 축제로 더 유명해졌다. 센사 축제와 카르네발레 축제는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축제였다. 카르네발레 축제 기간동안 사람들은 다양한 종류의 가면을 썼다. 베네치아 정부는 카르네발레 축제를 최대 6개월까지 지속했다.
3부 유럽 주변 도시와 북아메리카
- 나폴리
18세기 나폴리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였다. 특히 주변 자연 경관이 아름다웠다. 그러나 나폴리 시내에는 라차로니Lazzaroni라 불리는 거지들이 여행객들의 눈을 찌뿌리게 했다. 18세기 후반 여행객들은 비옥한 나폴리 사람들이 왜이리 가난하게 되었는지 분석했다.
나폴리는 오랫동안 주요 강국에게 정복당했다. 그들은 나폴리에서 많은 세금을 걷었다. 이후 독립한 나폴리 왕국 역시 국민들의 생활 수준을 높이지 못했다. 각료가 밀의 거래를 독점하고 농업생산물에 막대한 조세를 물려서 흉작은 말할 것도 없고 풍작이 되어도 곡물 가격이 떨어져 계속 가난하게 되었다.
- 이르쿠츠크
시베리아를 개발한 러시아는 시베리아를 유배지로 이용했다. 특히 자유주의의 영향을 받은 인텔리겐치아들을 많이 보냈다. 그 중 볼콘스키는 이르쿠츠크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러시아의 귀족이었던 그는 시베리아로 유배를 왔다. 그의 아내 마리야 역시 그를 따라 귀족 생활을 버리고 이르쿠츠크에서 일반 농노와 같은 생활을 했다. 1844년 볼콘스키의 이르쿠츠크 정착이 허가되자 그와 아내는 서로 다른 생활을 하게 되었다. 볼콘스키는 농노와 같은 ‘러시아식’ 삶을 유지한 반면 마리야는 기존 귀족의 삶을 추구했다. 마리야는 이르쿠츠크 사교계의 리더가 되었고 이르쿠츠크는 시베리아에 위치했지만 문화적으로는 완전 유럽풍이 되었다. 이 두 부부의 삶은 19세기 러시아 지식인들의 딜레마를 반영했따. 일부는 서구주의를 원했고 일부는 슬라브주의를 원했다. 마리야는 전자를, 볼콘스키는 후자를 택했다.
- 보스턴
보스턴은 1630년 1천명의 이주민이 찰스타운에 처음 정착하면서 생겼다. 신대륙에 찾아온 청교도들은 자신들이 꿈꾸는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보스턴에 공립학교와 대학을 설립했다.
올드 스테이트 하우스, 올드 노스 교회당, 올드 사우스 집회소, 퍼네일 홀 등은 18세기 초중반 지어졌다. 이 장소들은 미국 독립 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후 19세기에는 여성운동과 노예제 폐지에 앞장선 도시가 되었다.
- 뉴욕
네덜란드는 허드슨 강변의 맨해튼 섬에 뉴암스테르담을 건설하고 무역 중개지로 삼았다. 이후 17세기 중반 영국 식민지가 되었다. 종교의 자유나 다문화주의가 가장 발달했던 네덜란드의 영향을 받아 뉴욕은 영국 식민지 시절에도 사상과 이념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도시였다.
네덜란드 시절 뉴욕은 월스트리트가 북쪽 경계였고 18세기 초반에도 거기서 크게 확장되지 않았다. 그러다 18세기 설탕 산업이 발달하면서 뉴욕에는 무역상들이 몰려들었다. 동시에 무역과 관련된 각종 산업이 발달했고 금융, 법조계 등의 전문가들도 모여들었다. 이렇게 성장하면서 맨해튼섬 남단에만 위치하던 뉴욕은 18세기 중반 필라델피아 다음으로 큰 도시가 되었다.
독립전쟁 당시 뉴욕에는 영국과 가까운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그래서 독립전쟁 내내 영국군이 점령하고 있던 도시가 되었다. 독립전쟁 이후 미국은 뉴욕을 첫 수도로 삼으려 했지만 영국과 가까웠던 점, 상업 중심 도시였던 뉴욕 대신 워싱턴 D.C를 수도로 정했다.
4부 아시아
- 북경
북경에는 오래 전부터 사람이 살았다. 그러다 원이 대도를 건설해 수도로 삼고 명이 자금성을 지으면서 본격적으로 성장했다. 청은 장춘원, 기춘원, 원명원 등의 행궁을 건설했다. 북경의 자금성은 그 규모로 강력한 왕권을 보여줬고 인간계를 상징했다. 청이 건설한 원명원은 신계를 상징했다. 19세기 프랑스와 영국은 원명원을 약탈하고 불태웠다. 중국은 원명원을 복구하지 않으면서 제국주의 침략의 철증으로 삼았다.
- 도쿄
3대가 도쿄에 산 도쿄 토박이는 ‘에도코’라 부른다. 이들은 과거와 미래에 얽매이지 않고 지금 사는 것에 집중한다.
에도시대 일본의 3대 도시는 교토, 오사카, 도쿄(에도)였다. 교토가 문화도시라면 오사카는 경제도시였고 도쿄는 군사도시였다. 각 도시의 유녀들은 이런 도시의 색깔을 반영하듯 성격이 달랐다. 교토의 유녀는 우아했지만 도쿄의 유녀는 남성적이었다. 이를 ‘하리’라 불렀다.
에도 시대부터 무사들은 도쿄 시정인들을 억압하기 위해 화려한 복장을 금했다. 에도코들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복기령을 어기지 않는 범위 내에서 다양한 색을 개발하고 눈에 띄지 않는 곳에 화려한 장식을 하는 등의 기술 개발을 이루어냈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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