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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쌀, 재난, 국가 - 이철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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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저자의 전작인 '불평등의 세대'에서 연결되는 책이다. 왜 대한민국은 이렇게 불평등한 국가가 되었나? 라는 질문에 저자는 쌀 농사 문화를 그 이유로 들고 있다.

1. 쌀 농사 문화의 특징

쌀 농사는 밀 농사와 다르게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다. 또한 많은 물도 필요하다. 그로 인해 쌀 농사를 하는 지역에서는 공동체의 협업이 중요하게 되었고 물을 관리하는 국가 기관이 중요하게 되었다.

쌀 농사 공동체는 모두가 모여서 공동체 개개인의 땅에서 농사를 지었다. 그리고 자기 땅에서 난 생산물은 개인이 소유했다. 만약 내가 옆집 논에서 열심히 일해서 옆집 논은 많은 생산물을 얻었는데 옆집 사람이 내 논에서 대충 일해서 내 논에서 생산물을 많이 얻지 못했다면 나는 내년에 옆집 논에서 열심히 일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반복되면 그 마을의 공동체는 붕괴된다. 따라서 공동체는 엄격하게 관리되었다.

마을의 공동노동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것이 아니었다. 빠지거나 게을리하면, 그에 상응하는 평가와 벌칙, 불이익과 같은 엄격한 규율이 깔려 있는 조직체계였다.  (중략) 이들의 일상은 부모- 자식 간의 도리, 형제 간의 도리, 친척 간의 도리, 이웃 간의 도리들로 촘촘하게 짜인 '관계들' 속 의무 사항들로 가득 메워졌다.

이런 문화는 지속적으로 발달하여 쌀 농사 공동체에 소속된 사람들의 고유한 특색이 되었다.

집단주의 문화에 길들여진 벼농사 지대의 개인은 촘촘한 사회관계와 구조에 오랫동안 적응한 결과, 주어진 상황을 바꾸기보다 그 상황에 적응하는 방향으로 예측하지 못한 도전을 타개한다. 반면, 개인주의 문화 속에서 성장한 밀농사 지대의 개인들은 주어진 상황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재배치한다. 자신이 세계의 중심인 것이다. 집단주의와 개인주의 문화가 만들어내는, 다른 개인들이다.

쌀 농사 공동체의 또다른 특징으로는 공동 노동, 개별 소유였다. 같이 일하다 보니 옆집 사정에 훤해졌고 그로 인해 다른 사람과의 비교, 시기, 질투 등으로 이어졌다.

동아시아 벼농사 체제의 공동생산 시스템은 평등화를 향한 강한 집단적 심리 기제를 발동시키지만, 개별 소유 시스템은 무한 경쟁과 불신, 불평등에 대한 강렬한 개인적 욕망을 자극한다. 동아시아 벼농사 생산체제는 평등화와 불평등화에 대한 열망이라는, 이중의 심리 구조를 생성하는 것이다.

또한 쌀 농사 공동체에서는 경험이 중요한 요소였다. 한 해의 날씨를 예측하고 언제 모내기를 하고 언제 수확을 할 것인지, 재난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할 지 결정하는 데에는 경험이 가장 중요했다. 따라서 경험 많은 사람에게 권력이 있었다.

 

2. 쌀 농사의 현대로의 이식

쌀 농사 문화가 뿌리깊게 박혀있던 대한민국에 근현대 기업이 생겨났다. 이들은 어떻게 기업 문화를 만들었을까?
바로 쌀 농사 문화를 이식했다. 바로 연공제의 탄생이다.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숙련자가 없었기 때문에 기업에서 더 오래 일한 사람이 더 숙련되었다고 생각해서 그들에게 더 많은 혜택을 준 것이다. 이 제도의 장점으로는 근로자의 이탈이 적다는 것이다. 오래 일할 수록 월급이 올라가기 때문에 중간에 그만두고 나갈 이유가 적어졌다.

또한 쌀 농사 체제에서는 공동체가 복지를 담당했다. 누군가에게 문제가 생기면 공동체 내부에서 모든 것을 해결했다. 국가는 그저 커다란 재난 상황(가뭄, 홍수 등)이 생겼을 때 공동체가 잘 견뎌낼 수 있도록 보조하는 역할만 했다. 그로 인해 현대 사회가 되어서도 국가가 복지를 책임지기 보다는 사적으로(=가족 내부에서) 서로의 복지를 책임졌다.

사적 복지체제의 발달은 공적 복지체제가 발달하지 않아도 시민 사회가 스스로 실업, 가난, 질병, 사고의 위험을 버텨내도록 해준 기제 중 하나였지만, 동시에 공적 복지체제의 발전을 가로막는 요인이기도 했다.

 

3. 연공제

저자는 연공제야말로 현재 대한민국 사회의 여러 문제들의 원인이 되는 제도라고 주장한다.

1) 비정규직 문제와 임금 불평등

강한 연공제는 강한 노조가 지탱해주지 않으면, 근속연수를 (오히려) 줄이는 역효과를 갖는다.
상층 대기업 위주 임금 상승 투쟁을 통한 급격한 임금 인상은 하청업체와 비정규직의 임금을 억제하는 효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중략) 상층 대기업 정규직을 중심으로 조직된 노조의 전투적 경제주의와 연공제의 맞물림이, 노동시장 상위 20퍼센트와 하위 80퍼센트 노동자들 간의 임금 불평등을 확대하는 주요 메커니즘이다.

강한 노조와 연공제의 맞물림으로 기업의 인건비 부담이 늘어나게 되자 기업은 하청업체와 비정규직을 늘리고 그들의 임금을 낮게 유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노조에 소속된 사람의 연봉은 급격히 늘어나고 비정규직의 연봉은 제자리 걸음만 하게 된다.

2) 청년 실업

연공제를 틀어쥔 중,장년층과 청년층이 기업의 제한된 예산과 일자리를 두고 제로섬 게임을 벌이고 있고, 이 게임의 희생자는 청년 세대의 신규 진입자, 그중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자들이다.

연공제 + 정년 연령 상승으로 인한 인건비 부담으로 기업들은 신규 채용을 줄이게 된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청년들이 받게 된다.

연공제는 자본이 소개했지만, 1987년 이후 노동이 움켜쥔 제도로 바뀌었다.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을 기업에 붙들어매기 위해 시작한 연공제는 이제 그 누구보다 (상층) 노동자들이 좋아하는 제도가 되었다.

3) 남녀 차별

벼농사 체제에서 여성들은 노동에 참여했지만 주요 의사결정에서는 배제되었다. 그 문화 역시 현대 사회로 고스란히 넘어왔다.

벼농사 체제의 여성 착취, 여성 배제 구조는 현대 동아시아, 특히 한국(과 일본) 사회에서 강력하게 현존한다. (중략) 여성 노동자들의 다수는 기업에 비정규직으로 고용되어 있고, 따라서 연공제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중략) 여성들은 각종 차별과 출산 및 육아 부담 등의 이유로 노동시장에서 조기에 빠져나온 후, 연공제를 누릴 수 없는 파트타임이나 임시직, 즉 비정규직으로 노동시장에 돌아온다. 따라서 조직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자들은 남성일 확률이 높다.
비정규직으로 고용되지 않고 정규직 연공제하에서 살아남는 절대 다수는 50대 남성일 수밖에 없다. 연공급은 여성을 배제하고 차별하는, 즉 젠더에 따른 불평등을 영속화하는 제도다.

 

4. 대안은?

저자는 대한민국이 재난 대비 구휼국가에서 보편적 사회안전망 국가로 변해야 한다고 말한다. 현재의 연금 제도는 일할 때 더 많이 번 사람들이 은퇴 후에도 더 많이 받는 구조인데 이 역시 문제라고 한다.

노동시장에서의 불평등이 은퇴 이후에도 지속되는 것이다. 노동 시장에서 연금 가입 기간이 충분하지 않은 비정규직의 연금 수혜액은 정규직의 절반에도 못 미칠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수평적인 소통 구조를 일상화하여 호칭을 단순화하고 상호 존대를 시행하며, 직원들이 직급을 가리지 않고 사내 의사 결정에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는 통로들을 제도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여성을 평등하게 대우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한다. 그 첫 출발점으로 업무 평가를 관리하는 부서에 여성을 충분히 배치하는 것을 들고 있다.

시험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시험은 차별을 영속화하는 기제다. 바로 그 영속화 때문에 탈이 난다. 시험 점수 1점 차이로 발생하는 이 영속화가 숙련의 형성과 평가 시스템의 발전을 가로막는다. 시험을 통과한 자들은 그 점수가 자신의 숙련을 입증한다고 '착각'한다.
시험 성적이 인간의 능력/잠재력을 충분히 측정하지 못(한다.)

연공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대안을 제시한다.

임금 피크제를 통한 고연차의 40대, 50대에게 돌아가는 보상을 줄여야 한다. (중략) 고성과자는 직능급과 성과급으로 보상하면 된다. 남는 인건비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에 일정 비율을, 나머지는 신입사원 충원에 쓸 수 있다. 고용주 입장에서는 더 많이 고용하고, 노동자 입장에서는 더 적게 일할 수 있다.
직무별로 다른 임금 곡선이 개인별 연봉제 및 능력주의와 결합하면 불평등이 한없이 확대될 수도 있다. 이로 인한 불평등을 통제한느 방법은, 독일처러 직무에 따른 임금 차별이 크게 벌어지지 않도록 노조가 통제하는 것이다.

 

5. 나의 생각

사회학 책을 읽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사회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배우는 것. 이 책은 이런 역할을 충분히 해낸다.
솔직히 중반부, 특히 코로나에 대한 대응 부분에서는 억지로 끼어맞춘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다. 밀 농사 문화와의 비교 부분 역시 그러했다. 과연 밀 농사 문화는 정말 그러할까? 실제로 겪어보지 못했으니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런 부분을 제외하고는 충분히 공감하고 동의할 만한 부분들이 많이 있었다.

연공제는 나에게도 너무나 익숙하다. 비록 나는 근무연수가 늘어난다고 월급이 늘어나는 구조의 직업은 아니지만 당연히 직원들은 해가 갈수록 월급이 올라가야 한다고 (무의식중에) 생각하고 있었다.

연공제의 가장 큰 문제는 그것을 없애기 위한 의사결정권자들이 연공제의 혜택을 가장 크게 받는 집단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 집단에 속하게 되면 (=정규직이 되면) 쉽게 포기하기 어려운 제도이기도 하다. 요새 성평등 문제에도 20, 30대 남성들의 엄청난 반발이 있는데 과연 연공제를 폐지한다고 하면 어떤 후폭풍이 있을지 상상이 안된다. 과연 그들이 연공제 대신 주어질 성과제에 대해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까? 과연 대한민국 기업 및 정부는 성과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 방법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상당히 회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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