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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이야기/[2017년~] 마취

마취과 의사의 척추마취 받은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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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아픈 데가 있어서 병원에 갔더니 원장님이 "이건 당장 수술을 해야겠습니다."라고 하시더니 당일로 바로 입원해서 수술받게 되었습니다.
부위가 하반신 쪽이라 척추마취를 해야 하는 수술이었습니다.
국소마취로는 수술을 받아본 적은 있었지만 척추마취는 처음이었습니다.
항상 마취를 하기만 하다가 직접 당해보니 기분이 참 묘하더군요.
일단 입원을 결정한 후 집에 가서 하룻밤을 보낼 물건들을 챙겨서 병원으로 돌아왔습니다.
시간은 대충 낮 12시쯤.
원장님이 수술은 1시반쯤으로 하겠다고 했습니다.
다행인지 전날 저녁 이후 아무것도 안 먹어서 금식 문제는 따로 없었습니다.
병실에 누워있으니 스르르 잠이 오더니 잠을 잤습니다.
문이 벌컥 열리면서 "수술하러 갑시다."라는 원장님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비몽사몽간에 일어나서 수술방으로 걸어갑니다.
혈압계와 산소포화도 모니터링을 한 후 원장님이 직접 IV 라인을 잡았습니다.
IV 라인 달아본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네요.
준비를 마치고 원장님이 옆으로 돌아보라고 합니다.
옆으로 돌아서 척추마취하는 자세를 취합니다.
등을 새우등처럼 볼록하게 만드는 자세죠.
솔직히 많이 긴장했습니다.
주사를 많이 무서워하기에 많이 아플 것 같았습니다.
주사바늘 살짝 찔리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국소마취인가? 본격적인 바늘은 어떤 느낌일까?'
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마취 다 되셨습니다"
라고 하시더군요.
정말 거의 안 아팠습니다.
제게 척추마취 받았던 분들도 이 정도 통증이었기를 기원하면서 하늘을 보고 누웠습니다.
마취되는 기분은 오묘했습니다.
보통 따뜻한 느낌이 든다고 표현하는 분들이 많았는데
사실 사람마다 반응이 완전히 다릅니다.
이게 개인차인지 같은 사람이라도 그때그때 다른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일단 저는 따뜻한 느낌은 들지 않았습니다.
그냥 점점 뭔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느낌이 들더니 다리가 무거워졌습니다.
어떤 분들은 척추 마취 후 마취되는 느낌을 아프다고 표현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그런 경우에는 해당되지 않았습니다.
그저 배꼽 아래쪽으로 뭔가 묵직한 느낌이...
수술 중 수술부위 통증은 전혀 없었습니다.
보통 뭔가 만지는 느낌은 난다고 하는 분들이 많은데
이게 만지는 느낌이라고 하기는 애매하고 '그냥 거기서 뭔가 하나보다' 요런 느낌입니다.
누르는 데 눌리는 느낌이 아니라 그냥 슥슥 지나가는 느낌이랄까.
대신 경우에 따라서는 아랫배가 뻐근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비뇨기계의 경우 일반적으로 마취되는 허리신경보다 조금 더 윗쪽에서 시작하는 신경이 분포해서 그렇다고 알고 있습니다.
마취 공부한지도 오래되어서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금방 하는 수술인데도 상당히 길게 느껴졌습니다.
낮잠에서 깬지 얼마 되지 않아 비몽사몽이라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수술하는 내내 왜 척추마취한 분들에게 살짝 잠을 잘 수 있게 도와주는지 알 것 같습니다.
왜 마취과 교수님들이 하반신 수술을 할 때 전신마취를 선호하시는지도 알 것 같습니다.
수술이 끝났습니다.
걸을 수 없기에 병실까지는 이동식 카트를 타고 갔습니다.
병실에서 원장님은 "머리 절대 들지 마세요"라고 계속 강조했습니다.
PDPH(경막천자 후 두통)를 예방하기 위해서겠죠.
사실 제가 마취할 때만 해도 PDPH와 고개 드는 게 크게 연관이 없다는 얘기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고개 안 들어도 생길 사람은 생기고 고개 들어도 안 생길 사람은 안 생긴다는 거죠.
하지만 혹여나 고개 들었다가 두통 생기면 너무나도 고통스러울 수 있기 때문에
최대한 침대에서 가만히 누워있었습니다.
원장님의 권장 ABR(At bed rest = 침상 안정) 시간은 마취 후 6시간이었습니다.
2시쯤 마취했으니 8시쯤부터 일어나서 돌아다니면 되었습니다.
전날 저녁 8시쯤 식사한 이후 물 한 모금 정도만 마셨기에 배가 너무 고팠습니다.
하지만 일어날 수 없으니 식사도 못합니다.
돌덩이같은 다리를 침대에 쭉 뻗은 채 누워있다보니 어느새 잠이 들었습니다.

8시가 되었습니다.
원장님이 병실로 와서 "이제 일어나서 화장실 가서 소변보세요. 소변 나오지 않으면 식사하거나 물 드시면 안됩니다."
라고 얘기해주십니다.
척추 마취를 하면 요의(소변을 봐야 한다는 느낌)를 담당하는 신경도 마취가 됩니다.
만약 물을 많이 먹어서 방광은 터질 것처럼 찼는데 요의를 느끼지 못하고 소변을 보지 못한다면 난감한 상황에 빠집니다.
대학 병원에서는 수술 후 요의를 느끼지 못하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런 경우 비뇨기과에 협진을 내서 방광 초음파를 하고 필요시 소변 카테터를 넣어서 소변을 빼줍니다.
제가 수술한 병원은 의사라고는 원장님 혼자인 의원이기에 방광초음파를 할 수 있을리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물도 마시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일어나봤습니다.
일단 두통은 없습니다.
다행입니다.
화장실로 가봅니다.
근력도 크게 떨어지지는 않습니다.
변기 앞에 섰습니다.
아랫도리가 아직도 감각이 없는게 소변이 전혀 나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분명 나는 손으로 만졌는데 만져진 느낌이 전혀 안 납니다.
그래서 소변도 당연히 안 나올거라고 생각했는데
신기하게도 소변이 나옵니다.
이런 것들은 마취 공부하면서는 배우지 못했던 내용입니다.
어쩌면 책 구석탱이에 있어서 신경 안 썼을 수도 있겠지요.
역시 사람은 겪어봐야 합니다.
소변을 보고 신나서 미리 준비했던 빵과 물을 먹었습니다.
앉아서 짐정리도 하고 핸드폰도 봅니다.
마취된 감각이 완전히 돌아오기까지는 대충 2~3시간 더 걸렸습니다.
대충 마취하고 8~9시간만에 마취 전처럼 돌아왔네요.
다음날 퇴원했습니다.
글을 쓰는 지금은 수술한지 1주일 정도 되었는데
두통같은 것은 없고 잘 생활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마취할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에게 이제 조금 더 적극적으로 척추마취의 특징에 대해 설명해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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