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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이야기/[2012년] 인턴

감사를 받을 줄 모르는 의사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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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3.26

성형외과에서 비서질 하다가 처음으로 제대로 된(?) 의사 노릇을 하게 된 홍익병원 응급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환자를 보려니 아침부터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어제 당직 서면서 밤새도록 레지던트 콜을 받느라 잠도 못자서 더욱 정신이 없었다. 나중에 보니 일요일 하루에 본 환자만 178명. 인계받을 때 3월 한달간 가장 많은 환자를 본 날 180명 정도를 봤다고 들었는데 나는 첫 날부터 그 기록에 근접했다. 어느 정도로 바빴냐면 아침 9시부터 자정이 지나 환자가 줄어들 때까지 밥은 저녁 겨우 먹었고 화장실은 한 번도 못 갔으며 자리에 앉은 것도 처방낼 때 빼고는 없었을 정도였다. 환자보는 요령이라도 있으면 좀 나았을 텐데 100% 초짜 의사였기에 과장님께 혼나고 간호사 선생님께 혼나고 레지던트 선생님들한테도 혼나면서 정신없이 털렸기에 더욱 정신이 없었다.

이렇게 정신없이 일하고 있는데 술기 명령 하나가 왔다. 자리에 누워있는 할머니에게 Finger enema를 하라는 것이었다. Finger enema가 무엇이냐면 손가락을 직접 항문에 넣어서 관장을 하는 것이다. 보통 관장은 항문으로 글리세린을 넣어 대장의 운동을 활발하게 하여 변을 보게 하는 것인데 그것도 실패한 경우 변이 나오는 것을 막고 있는 딱딱한 변을 직접 손가락으로 빼낸 후 변을 볼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Finger enema이다. 문제는 내가 단 한 번도 이 술기를 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과장님께서 항문 주변을 너무 세게 누르지 말고 살살 누르라고 하셨다. 그리고 환자의 상태를 계속 확인해서 vasovagal syncope이 오지는 않는지 확인하라고도 하셨다. 이게 내가 들은 술기 설명의 전부였다. ‘일단 가보면 알겠지’라는 심정으로 갔다.

할머니께 가보니 할머니는 변비 때문에 생긴 복통으로 매우 괴로워하시고 계셨다. 환자복으로 갈아입은 바지는 온통 똥범벅이었고, 자리 주변에는 똥냄새가 가득한 상태였다. 일단 자세를 잡게한 후 내 생애 최초의 finger enema를 시작했다. 항문 주변을 문지렀는데 딱히 변이 나올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래서 바로 손가락을 항문에 넣으니 바로 딱딱한 변이 만져졌다. 손가락으로 긁어냈다. 몇 번 긁어내니 한 덩어리는 다 빠져 나왔고 더이상 변이 만져지지 않았다. 이제 항문 내부를 살살 문질렀다. 장의 운동을 항진시켜 변을 내려오게 하는 것이다. 조금 문지르니 딱딱한 변이 또 만져졌다. 또 긁어냈다. 이걸 수차례 반복했다. 눈 앞의 봉투에는 똥이 가득했다. 양은 어린 아이 머리통 정도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냄새가 별로 나지 않았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그런건지, 아니면 그새 익숙해졌는지. 한참을 하는데 궁금증이 생겼다. 도대체 언제까지 해야 하는거지? 그런 궁금증이 생기고 한참을 지나서 간호사 선생님이 오셔서 한 마디 하셨다. “선생님, 어느정도 하셨으면 이제 화장실가서 변 보시라고 하세요.” 좀 일찍 말해주지…

정리하고 손을 씻는데 간호사 선생님이 어느 정도 빼냈는지 물으셨다. 계란 몇 알 정도? 라고 물으시길래 내가 10개 이상? 이라고 답하니 물음표가 가득한 표정을 지으셨다. 이 인간은 왜 이리 많이 뺐을까 하는 표정이었다. 처음 해보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선생님….

술기 후에 또 정신없이 환자를 보고 있는데 그 할머니가 내게 다가오셨다. 너무 감사하다고, 선생님 성함이라도 알고 싶다고 하시면서. 원래 이런 상황에 전혀 익숙하지 않은 나는 잘 가시라고 한 마디 하고는 다시 차트 정리하러 자리로 돌아갔다. 그 때 뒤에서 간호사 선생님의 한 마디가 들렸다. “선생님, 할머니 잘 보내드렸어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내가 한 술기가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해서 할머니의 그런 감사가 너무 과분하게 느껴졌기에 그냥 잘 가시라고 대충 말하고 할머니를 보내드렸다. 하지만 할머니 입장에서는 젊은 의사한테 너무 고마워서 고맙다고 말했는데 그 의사가 퉁명스럽게 답하고 가버린 것이었다. 할머니는 댁에 돌아가시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누군가 내게 칭찬을 해도 그 칭찬에 어떻게 대응해야할지 몰라서 그냥 헤벌쭉하게 웃거나 무표정으로 일관했던 나였다. 이번에도 할머니의 감사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랐고 또한 내가 한 일이 그다지 큰 일은 아니라는 나의 오만한 판단 속에 무표정으로 대응했던 것이었다. 여태까지는 누가 나에게 고마움을 표현할 일은 없었고 주로 누군가 나의 행동을 칭찬하는 일이 많았다. 그들의 칭찬에 나는 표정을 특별히 만들지는 않아도 ‘감사합니다’라는 한 마디면 어느 정도 대응이 되었다.  하지만 이제부터 나는 누군가 내게 고마움을 표현할 일이 많아질 것이다. (나 스스로는 그다지 큰 일을 하고 있다고 여기지는 않지만 그래도 남들이 볼 때 나는 ‘의사 선생님’이니깐.) 이제 감사를 받는 법을 배워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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