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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이야기/[2010년] 본3 실습

<스물일곱째주~스물여덟째주> 신촌,강남 신경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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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누군가 내게 본1,2 때 가장 재밌게 공부한 과목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망설임없이 신경과학이라고 답했을 것이다. 본과1학년 때 생화학과 생리학, 조직학, 해부학에서 헤매면서 의학공부에 대한 의욕을 점점 상실해갈 때 기초신경과학 분기말 공부는 내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다. 문족 위주의 공부여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마어마한 양의 기초신경과학이 분기말 전날(!) 내게 어느 정도의 이해를 허락하였다.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서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쭉쭉 뻗어있는 수많은 tract 들이 조금, 아주 조금 개념이 잡혔다. (물론 시험을 보고는 완전히 잊어버리고 말았지만) 2학년 때의 임상신경과학은 수업이 기대했던 것만큼 흥미롭지는 않았다. stroke 파트는 내과학에 가까웠고 epilepsy는 그저 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그나마 재밌었던 부분이 movement 파트(esp. 파킨슨 부분)와 척추 쪽이었다. 그래도 1년 내내 배운 수많은 과목 중 근골격의학과 함께 그나마(-_-) 재밌게 공부한 것이 신경과학이었다. (물론 성적은 재미와 비례하지 않는다.)
그랬기에 이번 실습은 엄청난 기대를 하고 시작했다. 하지만 실습 결과 역시 신경과는 학생에게는 너무 어려운 과라는 결론만 내려졌다. 질문에 대답 못하는 것에 교수님은 언짢아하셨지만 레지던트 선생님들은 '학생이 모르는 게 당연하지'라는 반응이 대다수였으니...

#2.
신촌에서는 stroke파트를 돌았다. 아침마다 stroke conference라 하여 신환이나 입원환자의 사진을 보는 시간이 있었다. 이 시간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참으로 황당하게 느껴졌다. 프로젝터 두 개를 켜고 화면을 양쪽에 띄워 놓은 다음 한 번에 약 20장이 넘는 MRI나 CT 사진을 슉슉슉 보면서 이상이 있는 부분을 찾아내는 교수님들의 능력이 정말 어이없을 정도였다. MR angio 사진을 볼 때엔 더욱 기가 막혔다. 혈관이 쭉쭉 뻗어있는데 어디 occlusion이 있고 어디 stenosis가 있다고 짚어내는 걸 보면... 그런데 한 5일을 연속해서 보고 나니 나도 조금 감이 잡히는 느낌이 있었다. 물론 누가 봐도 뻔한 병변만 보이긴 했지만;

#3.
신경과 실습의 핵심은 Neurologic examination이라고 모든 교수님이 강조하셨다. 하지만 학생의 입장에서 그 수많은 neurologic exam을 다 하는 건 정말 엄청난 부담이었다. 뇌신경 검사하고 motor/sensory 체크하고 cerebellum 체크하고.... 쭉쭉 이렇게 외워 봤자 환자 앞에 가면 그저 백지가 될 뿐이었다. 그래도 신경과 실습을 돌 때 neurologic exam을 안 하면 언제 해보겠냐는 심정으로 해보기로 했다.

내가 맡은 환자는 주말에 쓰러지셔서 입원한 분이었다. 첫 날 회진 때 교수님이 갑자기 (나와의 상의도 없이-_-) "이 선생님(=나)이 있다가 와서 이것저것 검사할테니 잘 협조해주세요"라고 말씀하시면서 맡게 된 환자였다. 증상이 말을 잘 못하시는 것 빼고는 양호했고 compliance도 좋아 보여서 나에게 배정해주신 듯했다. 마침 정신과에서 환자 분들과 수많은 대화를 나누며 어느 정도 환자와의 관계 형성에 자신이 생겼을 때라 자신있게 (다음날) 환자에게 갔다. 

stroke unit에 계신 환자분께 가서 내 소개를 하고 이런저런 짧은 얘기로 나름 rapport 형성(?)을 했다. 그리고는 신경학적 검사를 시작했다. 처음에 눈 움직이고 얼굴 표정 찡그리는 등의 간단한 신경학적 검사는 무난히 넘어갔다. 문제는 8번 신경 검사. 신경학적 검사를 제대로 공부해가지 않은 터라 무조건 뇌신경 1번부터 12번까지 다 해야만 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청신경 검사를 하는데 이게 생각만큼 쉽지가 않았다. 그 전에도 검사를 좀 엉성하게 했고 환자분도 좀 짜증이 나있는 것 같은 분위기라 웃음으로 넘어가려고 했는데 weber test 실패 이후 환자분의 표정은 많이 안 좋아지셨다. 그래도 어찌어찌 넘어가고 DTR을 하는데 전혀 튕겨지지가 않았다. 과도한 자신감 때문에 제대로 연습을 안해가서 그런 듯했다. 항상 내 팔다리에다가만 쳐봤으니 남의 팔다리에 칠 때엔 어떻게 해야 한다는 느낌조차 없었다. DTR도 또 어찌어찌 넘어가고 소뇌 검사를 하려고 환자분께 일어나 달라고 했다. 환자분은 엄청나게 불평 가득한 표정으로 일어나셨다. 그러고는 갑자기 tandem gait를 시작하셨다. 나는 Romberg test부터 하려고 했는데... 내가 '그건 다음에 하고 이것부터 해주세요'라고 했더니 날 무시하고는 그 길로 화장실로 들어가버리셨다. 난 화장실 문 밖에서 어찌할 바 모르며 기다리고 있었다.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고 나온 환자분은 나를 완전 무시하신 채 본인 자리에 누우시더니 피곤하다며 가라고 하셨다. 여전히 당황한 나는 인사를 드리며 stroke unit을 나섰다. 무언가에 홀렸다가 깨어난 듯한 표정으로.

stroke unit을 나온 후 왜 실패했는지에 대한 원인 분석에 나섰다. 1) 내가 학생이라고 밝혀서? 2) 내가 너무 못해서? 등등.. 원인이 무엇이든지 나는 자신감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가족같은(?) 정신과 병동에 있다가 일반 병동에 오니 다시 학생이라는 위치를 깨닫게 되었다고나 할까? 다음날 같은 조 친구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니 한 친구가 가장 그럴듯한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신경과에서 stroke 환자가 stroke unit에 있을 경우 2시간 마다 full neurologic test를 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환자분을 만나러 갔을 때가 대충 입원하고 3일쯤 지났을 테니 그 사이에 이러한 검사를 수십번은 하셨을 테다. 환자분의 마음을 이해는 하지만 그래도 바닥에 떨어진 나의 자신감은 어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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