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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양육가설 - 주디스 리치 해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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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아이는 부모가 키우는대로 자라지 않는가?’

책의 뒷면에 써 있는 문구다. 이 문구 하나만 보고 이 책을 읽어보게 되었다. 내가 평소에 궁금해했던 내용이기에.


우리는 흔히 어떤 아이나 젊은이가 문제를 일으키면 부모를 비난한다. 부모가 아이를 잘못 키웠기 때문에 아이가 저렇게 나쁜 행동을 한다고 말하면서. 사람들은 아이의 성장에 부모가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상식으로 받아들인다. 


저자는 우리의 이 ‘상식’에 “양육가설”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가설(assumption)’이라는 것이다. 검증되지 않은 것이라는 의미다. 우리는 아이의 성장에 부모가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검증되지 않은 가설일 뿐이라는 것이 저자가 이렇게 이름붙인 이유다.


저자의 주장을 요약하면 아이의 성격 및 성향은 유전과 환경의 영향을 받으며 이 중 환경은 가정 환경보다는 또래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부모의 영향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은 실제로 부모가 조성한 가정 환경의 영향이기 보다는 부모가 아이에게 물려준 유전의 영향이 더 크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아이들이 또래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된 원인으로 ‘범주화’라는 것을 제시한다. 아이들은 ‘범주화’를 통해 본인을 특정 범주에 속한 사람으로 인식하게 되된다. 그리고 그 범주에 속한 다른 아이들에게 내가 ‘외지인’이라는 느낌을 주지 않기 위해 그 범주의 특징을 모방하게 된다. 


이런 과정은 아이들만의 특징이 아니라 동물의 본성이다. 침팬지들은 무리지어 다니는데 ‘우리’ 무리가 아닌 ‘그들’ 무리에게는 매우 공격적으로 변한다. 만약 ‘우리’ 무리의 일부가 ‘우리’ 무리와는 다른 특성(예를 들어 병에 걸려 다리를 전다든지 등등)을 갖게 되면 ‘그들’로 간주하여 예전과는 다르게 대한다. 이렇게 세상을 ‘우리’와 ‘그들’로 나누던 습성이 그대로 이어져서 아이들도 스스로를 ‘우리’와 ‘그들’로 나누게 되고 본인이 생각한 범주에서 ‘그들’로 취급받지 않기 위해서 ‘우리’의 특징들을 습득하게 된다.


이런 ‘우리’ vs ‘그들’의 구도는 아이나 동물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른들도 자주 보인다. 요새 인터넷 커뮤니티들마다 ‘우리’와 ‘그들’을 나누고 서로를 헐뜯는 모습들을 너무나도 쉽게 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저자의 주장에 더욱 공감하게 되었다.



저자는 책 전반에서 이 ‘범주화’를 매우 강조한다. 아이가 어떤 ‘범주’에 ‘범주화’를 하느냐에 따라 완전 다르게 자란다는 것이다. 물론 이 ‘범주화’ 과정에는 아이의 유전적인 특징들이 작용을 한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는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끼리 범주화를 하게 될 가능성이 높고 운동을 잘하는 아이들은 그들끼리 범주화를 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만약 자신과 비슷한 특징을 가진 아이들이 적다면 어떻게 될까? 공부를 잘하는 아이가 적다거나 운동을 잘하는 아이들이 적으면? 그러면 아이들은 본인과 다른 특성을 가진 아이들 집단에 범주화를 하게 되고 그들의 특성을 닮아가게 된다. 즉, 운동을 많이 하던 아이도 공부만 하는 집단 사이에 들어가게 되면 공부를 많이 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아이가 어떤 범주에 속할지를 부모가 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부모는 그저 여러 범주가 있는 곳에 아이를 둘 뿐이고 어떤 범주에 속하느냐는 아이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또하나 알아둬야 할 점은 아이는 한 범주에만 속하지 않고 여러 범주에 동시에 속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 범주들을 오가면서 아이들은 각 범주에 맞게 스스로 특성을 자유자재로 바꾼다.


이 ‘범주화’ 이론이 얼마나 밝혀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 이론이 마음에 들었다. 나는 초등학교 친구들 만나면 초등학교 때 놀던 것처럼 놀고 고등학교 친구들 만나면 고등학교 때 놀던 것처럼 놀고 직장 친구들 만나면 직장 다닐 때처럼 논다는 생각을 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이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고등학교 때 만난 친구들은 고등학생 때의 범주 내에 있기 때문에 나는 그 범주에 맞는 특성을 보이는 것이다.


또 다른 예도 있다. 부모가 사투리를 쓰는데 아이가 서울에서 자라는 경우 아이는 학교에서는 서울말을 쓰다가 부모와 얘기할 때는 사투리를 쓰는 경우를 종종 본다. 이 역시 범주화 이론으로는 너무 쉽게 설명할 수 있다. 아이가 집과 학교의 범주를 자유롭게 오가면서 본인의 특성을 바꾸는 것이다.


이 범주화 이론은 아이들에게만 적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른들에게 적용해도 된다. 아이 때 가졌던 범주화 성향이 어른이 되었다고 사라질 리가 없다. 우리는 사회 생활을 하면서 다양한 범주에 속하게 되고 각 범주의 특성을 자연스럽게 획득한다. 그 결과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이라도 어떤 직업을 가지고 어떤 직장에서 일하느냐에 따라 특정 사안에 대해 완전 다른 생각을 가질 수도 있는 것이다.


범주화 이론에 빠져 아이를 어떤 범주에 넣을지만 고민하고 있다면 ‘유전의 영향’을 다시 한 번 떠올려야 한다. 아이가 범주화하는 과정에는 아이가 선천적으로 물려받은 특성이 절대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범주화한 후에도 유전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저자는 책 전반에서 부모의 영향을 매우 평가절하한다. 부모가 아이를 아무리 열심히 훈육한다고 해도 아이는 그 훈육의 결과를 부모 주변에서만 보여줄 뿐 밖에 나가 다른 범주에 속하게 되면 그 범주에 맞는 행동을 한다. 


저자는 아이들이 태어난지 얼마 안 된 순간부터 ‘나이’와 ‘성별’을 구별하게 된다고 한다. 어른이 아이에게 아무리 잘해줘도 아이는 어른을 본인과는 나이가 다른 ‘그들’ 집단으로 인식하고 유치원 등에서 또래를 만나게 되면 그 또래를 본인과 같은 ‘우리’ 집단으로 인식한다. 마찬가지로  성별도 본인이 생각하는 본인 성별에 맞는 집단에 범주화를 하고 그 집단의 특성에 본인을 맞춘다. 그 결과 집에서 아무리 여자가 자동차를 갖고 놀아도 된다고 말을 해도 유치원에 다녀온 여자 아이는 자연스럽게 인형을 갖고 놀게 된다. 


여기서 나는 많은 고민을 했다. 나 역시 양성평등 교육에 관심이 있던 사람이기에 아이가 본인 성별에 범주화를 하고 그 특성을 따라간다는 주장을 쉽게 동의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결국은 이게 맞을 것이라 생각한다. 최근 한 교사가 운동장에서 뛰노는 남자아이들과 그 뒤에서 꽃구경하는 여자아이들의 사진을 SNS에 올렸다. 그 사진이 내게 답을 줬다. 아이들에게 아무리 본인 성별 특성에 맞지 않는 것을 해도 된다고 강요해도 아이들은 쉽게 본인 성별 집단에서 벗어나는 선택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물론 이것은 ‘차이’일 뿐이다. 각 성별 특성의 차이가 차별의 근거가 되어서는 절대 안된다.


일찍부터 ‘나이’와 ‘성별’을 구별하는 아이들은 10대가 되어서야 ‘인종’을 구별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그 전까지는 다른 인종과도 쉽게 놀다가도 10대가 되면 같은 인종끼리 놀기 시작한다. 이 점도 인상적이었다. 사람이 커가면서 점점 본인의 정체성을 설정하게 되고 그 정체성에 맞는 범주를 따라 범주화를 진행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부모가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1. 부모가 아이에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한 범주가 많은 지역으로 아이를 옮겨줄 수 있다. 범죄 성향이 높은 곳보다는 낮은 곳에서 아이가 성장할 때 아이의 범죄 성향은 낮게 나타난다. 또한 조금 더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많은 곳에 있을 때 아이는 공부에 조금 더 매진하게 된다. 그러나 공부 잘하는 아이가 많은 곳에 가더라도 아이가 공부를 잘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아이가 항상 부모가 원하는 범주에 속해서 원하는 특성을 갖게 될 것이라 생각하며 안된다. 


2. 적어도 집이 편한 곳이라는 인식을 줄 수 있다. 아이가 집보다 또래와 어울리는 것을 선호하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아이를 집에만 붙들어둘 수는 없다. 하지만 집에 올 때마다 부모에게 잔소리 듣고 집을 불편한 곳이라 인식하는 것보다는 집에 오면 편하다는 생각을 하게 해줄 수는 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아이가 부모와 놀 것이라는 기대는 해서는 안된다.


나는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부모의 영향이 아주 적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이가 집 밖에서 본인을 범주화하는 것처럼 집 안에서도 본인을 범주화할 것이기 때문이다. 부모와 같은 직업을 선택하는 사람이 많은 것을 단지 유전의 영향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저자는 사람들이 믿는 '양육가설'을 깨기 위해 조금 극단적으로 표현했을 것이다.

이 책에서 강조하는 것은 내가 아이에게 나쁜 짓만 안하면 아이의 성장에 내 ‘책임’이 크지 않다는 것이다. 아이는 아이 스스로 커나가는 것이지 부모가 ‘키우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점이다. 아이가 부모의 뜻대로 성장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부모가 잘못 '키운' 것이 아니라 그런 유전자를 물려받았거나 본인이 부모의 뜻과 다른 범주를 선택해 범주화한 것이다. 부모들은 이제 부모라는 이름으로 지고 있던 책임감을 내려놓고 조금 더 편한 마음으로 자녀 양육에 임해야 한다. 그것이 부모와 자녀 모두에게 바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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