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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이야기/[2017년~] 진료실에서

의료기관 접근성 관련 에피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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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회관에 나갔다. 어떤 할머니 한 분이 가까운 보건진료소가 문을 닫는다고 하신다. 뭔 말도 안되는 소리지? 하면서 더 들어보니깐 며칠전 진료소장이 보건진료소 문을 닫는다고 다음부터는 혈압약을 보건지소 가서 받아 먹으라 했단다.

보건진료소가 문을 닫을 리가 없지만 할머니는 이미 먹던 혈압약이 떨어졌다고 하니 다음날 지소에 꼭 오라고 당부했다. 할머니는 거동이 불편하고 타고 갈 것이 없으므로 아들이나 며느리를 불러서 오겠다고 했다.

지소로 돌아와 보건진료소로 자초지종을 문의했다. 보건진료소는 역시 문을 닫는 게 아니었다. 지금까지 그 보건진료소에서 고혈압 약을 타가는 사람은 그 할머니가 유일했고 그 때문에 이제 약 더 안 들여오려고 할머니를 지소로 보낸 것이었다. 할머니는 보건진료소까지도 못 가셔서 매번 진료소장이 할머니 집으로 약 배달을 했다.

진료소에서 먹던 약을 기록하려고 할머니 이름으로 접수를 했다. 기록을 봤다. 2013년에 보건지소에 내원한 게 마지막 기록이었다. 그 때도 비슷한 내용이었다. 진료소에서 약 먹는데 보건지소에서 약 타먹으라고 해서 내원한 것이었다. 5년 전에도 보건지소에서 약 받아가라고 했는데 5년 후에도 여전히 보건진료소에서 약을 먹고 있던 것이다.

왜 이렇게 됐을까? 잘 모르겠다. 추정만 해본다. 교통수단이 없는 게 제일 큰 문제일 것이다. 할머니 집이 어딘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마을회관에서 보건지소까지 직선거리가 2키로가 넘는다. 건강한 사람이 걸어도 30분은 걸린다. 그 거리를 다리가 불편한 할머니가 걷는다면? 아들이나 며느리가 뭐하는지 모르겠지만 낮에는 매우 바쁜 듯하다. 이런 저런 사유로 병원 가시라고 몇 번 말했는데 '아들이 바빠서 병원에 못 데려간다' 혹은 '바쁜데 짬내서 겨우 다녀왔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있는 걸 보면.

그 할머니는 며칠이 지난 오늘까지 보건지소에 나오지 않았다. 아들이나 며느리에게 혈압약 타러 가야 한다고 얘기를 안한 것일 수도 있다. '바쁜 아들 번거롭게 하느니 그깟 혈압약'라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 어쩌면 본인을 모셔갈 사람이 너무 바빠서 미뤄둔 것일 수도 있다. 나 역시 잊고 있다가 갑자기 생각이 났다. 내가 1달에 한 번 약 갖고 할머니에게 갈 정도로 헌신적인 사람은 아니니깐.


이 할머니는 많은 농촌 어르신들(특히 여성)의 상황을 대표한다. 70~80대 할머니 중에서 운전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부분 큰 마을로 나가려면 남편이나 다른 젊은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렇기에 웬만한 사유가 아니면 멀리 나가질 않는다. 실제로 마을을 돌아다니다보면 추가 진료가 필요한 경우들이 있다. 보건지소에 오라고 해도 사람들이 잘 오지 않는다. 보건지소 및 보건진료소가 곳곳에 있지만 각 마을에서는 최대 수키로씩 떨어져 있다. 그저 혈압약이나 감기약을 타러 가기에도 쉽지 않은 거리이다.

모든 노인들이 이 할머니 같지는 않다. 하지만 분명 이 할머니같은 노인들은 마을마다 몇 명씩 존재한다. 이들은 아무리 가까운 곳에 의료기관이 있더라도 방문하기가 쉽지 않다. 이런 분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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